왜 그토록 많은 농민들이 거리에 나섰을까 [밭]
밑줄 치며 읽는 농업·로컬 ③정은정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
전남 보성 농민 백남기. 2015년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사경을 헤매다 2016년 9월 25일 숨을 거뒀다. 25일은 백남기 농민의 5주기이다. 그가 입원했던 서울대병원은 그의 사망을 ‘외인사’가 아닌 ‘병사’라고 기재했고, 경찰은 그의 시신을 강제로 부검하려 했다. 정은정 작가가 쓴 <아스팔트 위에 씨앗을 뿌리다>는 백씨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때부터, 가족들이 그의 장례를 치르기까지 투쟁 전반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 저자는 1970년 대부터 이어진 농민 운동의 큰 틀 안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는데, 덕분에 독자들은 질문 하나를 계속 붙들면서 책을 읽어나가게 된다. ‘정권을 막론하고, 왜 그토록 많은 농민들이 매번 아스팔트 위에 설 수 밖에 없었을까.’
“투쟁 기록단은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지고 숨을 거두기까지의 ‘사건’을 기록하는 것은 물론, 백남기 농민이 서울로 가야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매달리기로 했다. 왜냐하면 백남기 농민의 죽음의 원인은 두 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물대포라는 국가폭력의 물리적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끝없이 추락하는 농촌과 농민의 삶 자체다.”(p.7)
백남기 농부와 아내 박경숙 농부는 전남 보성에서 벼농사를 지었다. 생산비도 건지지 못하는 쌀값 수준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컸는데,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농촌 지역에 붙어있던 박근혜 대선 후보의 현수막에는 ‘쌀값 인상, (80㎏당) 17만원을 21만원으로’라는 글이 써 있었다. 이후 박근혜 정부는 ‘쌀값 인상은 공약이 아니었다’고 말해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백씨가 경찰 물대포에 쓰러지기 직전 해인 2014년에는, 정부가 20년 동안 막고 있었던 쌀 시장을 개방했다. 농민들은 ‘값싼 외국산 쌀이 본격적으로 수입되면 쌀 값이 더 떨어질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농림축산식품부는 수입 쌀에 513%의 높은 관세를 물게 하면 문제 없다며 쌀시장 개방을 강행했다.
앞서 한국은 20년 동안 쌀시장 개방을 미뤄오면서 그 대신 매년 일정 물량의 쌀을 낮은 관세(5%)로 수입해 왔는데, 이 양(최소시장접근·MMA)이 매년 늘어나 2014년에는 40만8700톤이나 됐다. 이 안에는 밥쌀용 쌀도 포함돼 있었다. 쌀 시장 개방 이후에도 이 물량 만큼은 5%의 저율 관세로 매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지만, 밥쌀용 쌀 포함 의무는 사라진다. 5%의 관세로 수입하는 쌀 40만8700톤 물량에 대해서는 밥쌀용이 아닌, 가공용 쌀을 수입하는 방식으로 국내 쌀 시장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농림축산식품부는 5% 저율 관세로 들여오는 수입 쌀 일부 물량을 밥쌀용 쌀로 수입하겠다고 밝혔다.
백씨가 ‘밥쌀용 수입 저지!’라고 쓴 파란 조끼를 입고 상경 투쟁에 나선 건 이 때문이다. “농민단체들이 막무가내로 쌀 개방 반대를 외친 것이 아니었다. 농민단체들은, 어쩔 수 없이 수입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면 밥쌀 말고 가공용 쌀로, 또 해외원조를 활용해 국내 농업이 입을 타격을 최소화하자고 제안했다. 타협안까지 제시하며 정부와 협의해 가고자하던 차에 밥쌀 수입이 기습적으로 결정돼 농민들의 분노가 더욱 거세졌다.”(p.97) 쌀시장 개방 7년 째인 올해도 5%의 저율 관세를 물고 국내 시장에 들어온 밥쌀용 쌀들이 4만 톤에 달한다.
농산물 시장 개방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만들어지면서 본격화했다. 2003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에서 농부 이경해는 ‘WTO가 농민들을 죽인다’라는 문구를 몸에 두르고 자결했다. 그는 WTO에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작목, 저 작목으로 틈새를 찾아다녔지만, 항상 그 틈새에서 도망친 다른 동료들을 만날 뿐이었다. (중략) 나는 하룻밤 새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버린 친구의 낡고 오래된 빈집을 돌아보며 그가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빚에 눌려 농약을 마시고 자살한 친구의 집으로 달려갔지만 친구 부인의 애달픈 울부짖음을 듣고도 아무 조치도 하지 못했다.” WTO는 정부가 곡물을 높은 가격에 사들여, 시장에 낮은 가격으로 파는 ‘이중곡가제’를 ‘시장 가격을 왜곡시키는 보조금’이라며 금지했다. 이 때문에 ‘추곡수매’ 등 쌀에 대한 각종 정책들이 폐지되거나 변경됐다.
“국가가 관장하고 국가 차원에서 쌀을 사들이던 시대는 진작에 끝났다. 오히려 쌀을 받아줄 수 없다며 농협과 국가가 버티고, 쌀 농사를 포기하면 보조금을 주겠다고 말한다. 농민대회 연단에 오른 경상도 출신의 사회자가 ‘살값 21만원 보장하라!’고 구호를 선창한다. 말 그대로, 쌀값은 농민의 살값이다.”(p.94)
쌀값이 떨어지자 하우스를 짓고 다른 농사로 전환하려는 농민들이 늘었다. “처음 이 마을에 대형 시설은 여기 농장 뿐이었어요. 그런데 저길 보세요. 논 위에 비닐하우스가 해마다 올라와요. 저렇게 시설 재배가 늘어나고 무언가를 길러도 결국 전국적으로 다 늘어나니 가격은 떨어지죠. 폭락의 악순환이에요. 몇년 뒤에는 다시 시설을 보수해야 하니 남는 것이 없어요. 시설 업자와 자본만 돈을 버는거죠. 시설 걷어내고 그 자리를 논으로 다시 바꾸는 일은 불가능해요.”(p.268, 충남 예산 농민이자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 김영호의 말)
백남기·박경숙 농부는 밀농사도 지었다. 11월 경 씨앗을 뿌려 이듬해 6월에 수확하는 밀 농사는, 선뜻 결정하기 어려운 농사다. 벼농사에 비해 손은 덜 가지만, 수확을 해도 팔 곳이 없다. 이 때문에 밀의 경우, 자급률은 1% 수준이다. 2011년 정부는 밀 자급률을 2015년까지 10%로 높이겠다고 했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2016년에는 ‘2020년까지 밀 자급률이 5.1%가 될 것’이라고 했다가, 2018년에는 ‘2020년까지 9.9%가 될 것’이라고도 했다. 지난해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2030년까지 밀 자급률을 10%로 높이겠다고 말했는데, 농민 대부분은 이 약속도 깨지리라는 것을 경험상 안다.
외국산 밀가루 수입으로 초토화된 국내 밀농사가 그나마 자급률 1%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건 십수 년간 ‘우리밀 살리기 운동’을 벌인 가톨릭 농민회와 한살림 등의 노력 덕분이다. 백남기 농민 역시 가톨릭 농민회 소속 농부다. “백남기 농민은 ‘쌀은 지키고 보리와 콩은 더 먹고 밀은 살리자’라고 농사의 결을 정한 뒤 동료와 후배들을 독려해 함께 밀농사와 콩농사를 지었다. 백남기 농민이 고향 보성에서 마지막으로 한 일도 아내 박경숙과 함께 백중밀 씨앗을 손으로 일일이 파종한 것이다.”(p.79)
거리로 나서는 ‘아스팔트 농사’가 본격화한 건 1976년 ‘함평 고구마투쟁’ 부터 였다. 당시 함평 농민들은 ‘고구마 전량을 사들이겠다’고 약속한 농협을 믿고 상인들에게 고구마를 넘기지 않았는데, 정작 농협은 생산된 고구마의 40%만 사들였다. 나머지 고구마가 썩어가기 시작했다. 가톨릭 농민회가 1년 7개월 투쟁 끝에 피해 보상을 받는데 성공했다. “서슬 퍼런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농민이 승리한 첫 번째 싸움이었다.”
신군부 때는 정부가 축산업을 밀어붙였다. 뉴질랜드와 캐나다 등에서 송아지가 수입됐고, 축사를 짓고 가축을 들인다고 하면 농협이 돈을 빌려줬다. 농민들은 송아지를 사서 키운 뒤 팔아서 빚을 갚으려고 했지만 소값이 폭락했다. 축산 농민들이 목을 매달았다. 1985년 소값 인상 투쟁(소몰이투쟁)이 진행됐다. 백남기·박경숙 부부도 1983년부터 3년 동안 소를 키웠다. “송아지를 들일 때 빌린 입식 비용과 사료값이 백남기 부부의 첫 농가 부채인데 이 빚이 계속 불어나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p.74)
책에 기록된 ‘백남기 농민 투쟁’은 남성 농민 만의 투쟁사가 아니다. 가부장적인 농촌 사회에서 남성 농민의 보조적인 역할로 그려졌던 여성 농민들이 실상은 농사 일을 하는 또 다른 주체이고, 그간의 농민 운동을 가능케 했던 또 다른 주역이란 점을 곳곳에서 밝힌다. 백남기 농부와 밀과 콩, 쌀을 함께 키웠던 이도, 백남기 농부가 박근혜 정권에 맞선 상징적인 존재가 된 상황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방향을 정하고 가족들을 이끌었던 이도 아내 박경숙 농부였다. 저자가 “이 글은 백남기들의 이야기이자, 박경숙 농민의 기록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의 여성 농민들이 2016년 1월 광화문 광장에서 천 배를 올린 것에 대해서도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농사란 오로지 사람의 무릎과 허리로 짓는 것이다. 쪼그려 앉아서 해야 하는 밭일을 주로 담당하는 여성 농민의 무릎은 성한 경우가 드물다. 그 성치 않은 무릎을 천 번 끓어 광화문 광장 아스팔트를 녹였다” (p.136)
새 정부가 들어서자 새 정부 인사들과, 경찰 관료들이 백남기 농민 유족과 시민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저자는 “가장 제대로 된 사과는 농민들이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래서 굳이 보성에서 서울까지 집회하러 올라갈 필요 없도록 노력하는 것 뿐”(p.7)이라고 말한다. 농촌이 가난해지면서 사람들이 다 떠났다. 보성에서 서울까지 집회를 하러 올라갈 농민들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는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 지금의 농정과 로컬 정책은 농민들이 편히 농사 지으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인가.
더 읽어볼만한 책으로 <땅의아들3: 농민운동가 노금노 유고집> (노금노유고집간행위원회 엮음, 돌베개)를 추천한다. 1970년대~1990년대 치열했던 농민운동의 역사가 담겨 있다. 최근 농촌 현안과 이에 대한 농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2020 농민들>(한국농정신문 지음, 한국농정)을 봐도 좋을 듯 싶다.
※백남기 농민 5주기 추모제는 25일 낮 12시 광주시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옛 5.18 묘지)에서 열린다. 온라인추모관 ‘내가 백남기다’(http://baeknamgi2015.kr/)에서도 추모 글을 남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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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도시가 정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로컬에서 다른 삶을 살아 보려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스타트업을 하거나, 가게를 내거나, 농사를 짓습니다.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버티컬 채널 ‘밭’(facebook.com/baht.local)은 로컬에서 어떤 삶이 가능한지를 탐구합니다. ‘서울 말고 로컬’ 연재로 나만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facebook.com/baht.local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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