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진실독점주의

배민영 입력 2021. 9. 24.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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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14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수련생 아드소와 신학자 윌리엄 신부가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그 선배는 "기자가 정의감을 앞세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기자는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증거 확보에 나서는 검경과 달리 강제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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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갓 스무 살이 되어 접한 움베르토 에코(1932~2016)의 ‘장미의 이름’ 마지막 구절을 읽고 머리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저자는 기호학자이자 철학자, 역사학자로서 지식을 이 책에 쏟아내다시피 했다. 그러다 결말에서는 클뤼니의 베르나르가 쓴 시 ‘속세의 능멸에 대하여’를 이야기했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진실이나 절대 진리란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말하고 있었다. 설령 누군가 강제로 만들었어도 언젠가는 시들어버릴 한 송이 장미에 불과하다는 엄중한 ‘경고장’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배민영 정치부 기자
이 책은 추리소설이다. 14세기 이탈리아 북부의 한 수도원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수련생 아드소와 신학자 윌리엄 신부가 함께 풀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여기서 윌리엄은 합리적 지성의 상징이자, 범인인 호르헤 신부와 대척점에 선 인물로 묘사된다. 호르헤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노인이지만, 장서관 내 어느 서가에 어느 책이 꽂혀 있는지 속속들이 파악한 인물이다.

호르헤의 범행 동기는 수도사들이 ‘웃음’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론’을 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신이 웃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니 인간도 절대 웃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비뚤어진 소신이었다. 윌리엄에게 발각된 그는 희극론 책장을 한 장 한 장 뜯어 자신의 입에 욱여넣었고, 몸싸움 끝에 결국 장서관에 불을 내며 비극의 종지부를 찍었다. 웃음이라는 자연스러운 행위를 죄악시한 호르헤는 단지 ‘사실’에 접근하려 한 수도사들을 가장 극단적 수단인 살인으로 막아냈다. 궁지에 몰리자 ‘기록’을 훼손하려 들었다. 그 책이 있든 없든 누구나 울고 웃지만, 호르헤한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중세판 ‘빅 브라더’였다. 진실독점주의자의 말로는 허망했다.

신문사에 갓 입사한 뒤 선배에게 교육을 받으며 이 책을 떠올렸다. 그 선배는 “기자가 정의감을 앞세우면 안 된다”고 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오직 팩트(사실)뿐이며, 팩트에 접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기자가 자칫 공명심에 사로잡혀 ‘나만의 진실’에 갇히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는 뜻으로 들렸다. 호르헤처럼 굴지 말라는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언론중재법 개정안 강행 처리 시도를 바라보며 이 책을 다시 떠올렸다. 언론중재법은 팩트 전달이라는 언론 고유의 역할을 가로막을 우려가 커 국내외 시민사회단체, 나아가 유엔까지 주시하고 있다. 여당은 아랑곳하지 않고 27일 국회 본회의에 법안을 올리겠다고 못 박았다.

기자를 ‘구원’하는 건 팩트뿐이다. 그런데 기자는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증거 확보에 나서는 검경과 달리 강제력이 없다. 그런 검경조차 법정에서 유죄를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일 정도로 사실 입증은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팩트의 조각’을 하나하나 모아 검증하고 보도하는 게 언론의 일이다. 문제는 언론중재법이 언론의 사실 접근 및 보도를 위축시켜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할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이제 민주당이 ‘현대판 호르헤’가 될지 지켜볼 일이다. 뭔가 숨길 게 많아서 저런 걸까.

배민영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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