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창신동 박수근 살던 집을 찾아서

- 입력 2021. 9. 24.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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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마루서 그림 그렸다는 한옥
지금은 순대집 변해 일부 형체만

작가 박완서를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장편소설 ‘나목’을 거치게 되고 그러면 또 꼭 박수근을 알게 된다. ‘나목’은 6·25전쟁 시절 박완서 자신과 박수근의 만남을 소설적으로 그린 작품인 까닭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 이경은 폭격으로 두 오빠를 잃고 아버지도 안 계시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살아간다는 것, 살고 싶다는 것이 지상 명제인 그녀는 미군 PX가 있는 지금의 신세계에 취직을 한다. 여기서 미군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그림쟁이 속에서 진짜 화가 옥희도를 발견한다. 작중에서 이경은 계동 한옥마을에 사는데, 옥희도는 어디 살았던가? 아무튼 이 옥희도의 모델 인물 화가 박수근은 그 당시에 동대문 바깥 창신동에 살았다. 본래 박수근은 양구 태생, 강원도 사람이다. 보통학교만 나오고 52세를 일기로 세상 떠난 인생을 평생 그림과 함께 살았다. 일제강점기 그의 삶은 선전(조선미술전)에 도전, 입선을 거듭한 것으로 나타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결혼 후 그는 직업을 구해 평양에 가 살다가 6·25전쟁 직전에는 금화에 살았다. 조만식의 민주당에 발을 담그기도 한 그는 전쟁 발발을 앞뒤로 생명의 위기를 여러 번 겪었다. 결국 식구와 헤어져 먼저 월남해 군산 같은 곳에서 노동 일도 한다. 이런 그가 창신동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내 김복순의 남동생 집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인민군의 위험 앞에서 홀로 먼저 남하한 박수근은 처남 집을 찾아가 의탁하며 매일같이 북쪽에 두고 온 식구를 그리워하는데, 마침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내려온 아내와 극적으로 상봉하게 된다.

지하철 동묘역은 내게는 늘 반갑고도 안쓰러운 감정을 품게 한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것, 이미 세월을 많이 겪은 것이 그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과 함께 남은 시간을 견뎌가는 것이다. 오늘 내 발길은 동묘 쪽 중고시장이 아니라 지봉로를 따라 박수근이 35만원에 어렵게 장만했다던 한옥집을 향한다. 동묘역 6번 출구로 나와 많이 걷지 않아 ‘시즌빌딩’이라는 건물이 나오고 ‘완구거리’ 입구를 지나자마자 박수근 집이 나온다. ‘별별국수’집 바로 옆 골목에 박수근 집 표지판이 있고 그 옆 ‘정삼품순대’집이 유명한 화가의 옛집인 것이다.

창신동 393-1번지라 하는데, 표지판은 바로 이 집 벽에 붙어 있다. 현재 주소를 찾아보면 지봉로 11이다. 아내 김복순은 동생 집에 얹혀살다 어렵게 구한 이 집을 박수근이 얼마나 마음에 들어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이 집 ‘대청마루’에서 그림을 그렸고 그 시절 식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아직 남아 있다. 나는 표지판에 새겨져 있는 박수근의 인생행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지금은 건물의 형체만 남아 있는 박수근 집이 아쉬워 인근에 옛날 모습이 남아 있는 한옥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한다. 아주 오래된 제본소 건물 근처에 제대로 된 한옥집 대문이 보여 카메라에 담아둔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니 골목 안이 다시 넓어지며 ‘계’라고 쓴 ‘닭도리탕’ 한옥집도 보여 들어가 보기도 한다.

이런 곳이었을까, 박수근 생전의 집은? 그윽한 풍취가 스며든 음식점 집 한옥 내부를 살펴보며 나는 화가의 옛날 집 정취를 떠올려 보려 한다. 그러나 그 집은 1962년에 도로가 넓혀지면서 앞이 잘려나가 버렸다고 했다. 땅이 남의 땅인 줄 모르고 산 집이었다고 했다. 작업실 삼아 쓰던 대청마루가 제구실을 못하게 되고 땅주인이 나타나 소송이 붙으면서 전농동 쪽으로 옮겨가 살게 되지만 불과 2년 만에 간염, 신장염이 겹쳐 세상을 떠난다.

보통학교만 나온 그는 평생을 간판 좋은 미술계에 ‘치여’ 살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참고 견디며 자신의 예술의 완성만을 꾀했다. “터무니없는 말을 듣고 분할 터이지만 맞서지 말고 믿음으로 참으로, 우리의 분함이나 억울함도 모두 하나님이 아시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의 재판을 해줄 것이니 악을 선으로 갚으라.” 아내가 터무니없는 악소문에 시달려 호소할 때 그가 보냈다는 말이다. 해코지 많고 시기와 악담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는 얼마나 오래 참아야 했을까. 창신동 낮은 집의 낮은 사람의 성스러운 그림은 이 끝없는 인내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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