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이야기를 나누다

- 입력 2021. 9. 24.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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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연휴 오랜만에 가족 만나
명절음식 나누며 얘기 꽃 피워
이야기는 사람을 잇는 연결망
팬데믹 시대 극복해 나갈 힘 돼

추석 연휴가 지난 지 이제 사흘밖에 되지 않았을 뿐인데 벌써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예방접종 완료자들 포함해서 오랜만에 여덟 명의 가족이 모여 명절 음식을 나눠 먹고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지켜왔던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이었는지 명절 연휴마다 그랬던 일들이 올해는 더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족들이 헤어질 때는 다음 명절에는 모든 가족이 다 모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 최근으로서는 가장 많이 모일 수 있었던 가족과 보낸 시간의 어떤 점이 좋았을까 돌아본다. 그렇게 특별한 게 있었나? 그저 서로의 안부를 묻고, 겪었던 일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을 뿐인데.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구나, 하고.
조경란 소설가
종이에 ‘이야기’라고 쓰고 그 뒤를 이어본다. 이야기를 듣다, 이야기를 하다, 이야기를 꺼내다, 이야기를 털어놓다, 이야기를 전하다, 이야기를 짓다, 이야기를 쓰다. 팬데믹 시대를 보내기 어려운 많은 이유 중에는 어쩌면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 없고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혹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지쳐가는 이유도. 가까이, 마주 보고 앉아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만 가질 수 있는 공감과 이해를 나누지 못해서. 이야기의 기본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팬데믹 시대에 작가들은 어떤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하고 있을까.

‘데카메론 프로젝트’라는 소설집은 기획부터 흥미로웠다. 지난해 3월 뉴욕시에 봉쇄 명령이 시작됐을 때 서점에서 갑자기 팔려나가기 시작한 책이 있다고 한다. 피렌체에 흑사병이 만연하자 그 도시 밖으로 피신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들려주는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뉴욕타임스는 동시대 작가들에게 격리 중에 쓰인 신작 단편 소설들을 모아 우리 시대의 ‘데카메론’을 만들기로 했다. 그 결과물이 이 단편집이다. 즉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몇 가지 인상적인 단편 중에서 지금은 전 세계인이 팀워크를 이루고 있으며 그 팀이 해낼 수 있는 일은 이 풀코스를 완주하는 것이라고 표현한 토미 오렌지의 ‘더 팀’.

이번에 다시 읽은 국내 작가 여섯 명이 쓴 ‘팬데믹-여섯 개의 세계’는 공상과학(SF) 단편 소설이라는 점이 특히 관심을 끌었다. 자신과 서로를 위해 긴 시간 집에서 지내야만 했던 독자들에게 마치 ‘지금 우리에겐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합니다’라는 인사를 보내는 듯하다. 작가들의 개성이 돋보이는 단편 중에서도 정소연의 ‘미정의 상자’가 기억에 남는 이유는 SF라고 믿고 싶을 만큼의 조용히 잔혹한 현실 세계를 조목조목 그려냈기 때문이다.

‘데카메론 프로젝트’를 읽고 나서야 100편의 이야기를 담은 ‘데카메론’의 메시지는 메멘토 비베레(Memento vivere) 즉 “당신은 살아야 할 운명임을 기억하라”라는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됐다. 팬데믹 시대에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하고 듣고 쓰는 힘으로도 살아간다. 이야기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지금 내가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리게 한다는 점이기도 하다.

흡인력이 있는 이야기, 귀를 쫑긋 세우고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진짜 이야기,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고 기다리게 만드는 이야기. 나는 이런 점들이 좋은 이야기의 조건이라고 믿고 있다.

때로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나와 친밀하다고, 내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경청해 주곤 했던 사람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하나의 연결망’이라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이야기를 이어받고, 듣고, 하는 것만으로도 이 어려운 시대를 건너갈 수 있다고 낙관하고 싶다. 친밀함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한 사람, 누군가에게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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