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겐 정리된 이불장이 힐링 장소였다 [삶과 문화]

입력 2021. 9. 2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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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쯤 됐을까.

정리했던 물건들이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이불 정리된 게 흐트러질까봐 보기만 했어요. 가족들에게 아무도 건들지 말라고까지 했다니까요." 그 말을 듣고 놀란 나는 "6개월이나 지났는데 손도 안대셨다고요? 이제 겨울이불 꺼내셔야 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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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한 10년쯤 됐을까. 아이가 어릴 적 내 휴대폰으로 했던 게임을 다운받아 놓았던 적이 있다. 어느 날 게임에서 지급되는 하트(게임을 한 번 더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왔다. 저장된 이름을 보니 예전 상담했던 고객이었다. 인사 겸 간단하게 안부를 물었더니, 내게 전화를 걸어와 ‘1년이나 지났는데 기억하시냐’고 감동하면서 그간의 일을 말해주었다.

그 고객은 당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의사가 치료방법 중 하나로 추천해준 것이 정리정돈이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리정돈 컨설팅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였고 집도 지방이어서, 주변에서 정리전문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인터넷 검색을 통해 나를 찾게 되었다.

상담을 통해 내가 제시했던 기본 견적은 120만 원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격대가 높아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정리정돈이 너무 받고 싶어 결국 1년 동안 10만원씩 적금을 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적금만기가 되어 바로 연락할까 고민하다 먼저 하트를 보냈는데, 내가 1년 전 상담했던 본인을 기억하고 안부를 물어온 것이 너무 놀랍고 고마워서 즉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얼마나 정리정돈이 간절했으면 1년 동안 적금까지 부었을까. 사실 출장 가기엔 좀 먼거리였지만, 난 그 간절함 때문에 결국 일을 맡게 되었다.

정리정돈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중에, 고객이 전화상담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냉장고 구입을 위한 상담이었다. 이미 냉장고와 김치냉장고 2대가 있는데도 또 냉장고를 구입하다니! 이런 경우 십중팔구 저장강박이 있다고 봐야 한다. 어쨌든 정리작업은 마무리됐고, 고객 가족들은 모두 만족감을 표시했다.

6개월이 흘렀다. 계절이 바뀌어 안쪽에 수납했던 옷을 꺼내는 작업을 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고객 집을 다시 방문했다. 정리했던 물건들이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유지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특히 이불장에 있는 이불들은 정리 상태가 너무도 깔끔했다. 우리는 그 고객에게 어쩌면 이리도 정리를 잘하셨냐, 정리전문가 하셔도 되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대답이 뜻밖이었다. “이불 정리된 게 흐트러질까봐 보기만 했어요. 가족들에게 아무도 건들지 말라고까지 했다니까요.” 그 말을 듣고 놀란 나는 “6개월이나 지났는데 손도 안대셨다고요? 이제 겨울이불 꺼내셔야 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고객은 웃으면서 "그렇지 않아도 남편이 춥다고 겨울이불 꺼내달라고 했는데, 여기 흐트러지면 안 되니까 절대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새 이불을 샀어요"라고 말했다.

정리가 흐트러지는 게 싫어 새 이불을 산다? 이 또한 집착은 아닐는지! 하지만 고객의 얘기를 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정리 잘된 이불을 보면 우울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복잡한 생각도 정리되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이불장을 열고 한참을 서서 이불을 바라본다고 했다. 정리된 물건이 힐링포인트라는 얘기였다. 남편도 사용하지도 않을 물건을 뭐하러 갖고 있냐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정리된 이불장을 통해 아내의 우울증이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기꺼이 새 이불을 사왔단다.

그렇다. 정리는 힐링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물건을 보면 힐링됐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복잡한 세상이지만 내 주위만큼은 깔끔하게 해보자. 그래서 내 주변을 힐링 스팟으로 만들어 살아보자.

김현주 정리컨설턴트·하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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