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석의 농담(籠談)] 유재학
“그런데 올 시즌은 작년 이맘때와 느낌이 또 다르다. 올해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라는 게 있다. 어린 선수들이 얼마나 성장해줄지, 어떤 경기를 펼쳐줄지 기대가 된다. 팀의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게 정말 크다. 설레는 감정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프로농구 모비스 피버스의 유재학 감독을 인터뷰한 온라인 기사를 읽고 반가웠다. ‘농담’을 읽는 독자가 혹 계신다면 그분들은 필자가 유 감독의 오랜 팬임을 짐작할 것이다. 농구를 취재하는 기자로 일하는 동안에야 “나는 유재학 감독을 좋아합니다.”라는 식으로 말하거나 기사를 쓸 수 없다. 그러나 농구기자 일을 그만둔 지 10년도 더 지났으니 ‘커밍아웃’을 해도 큰 후환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유재학 감독을 매우 좋아한다. 그가 이룩한 업적을 존경하며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한 사나이로서의 인격을 신뢰한다.
기자 시절의 나는 유재학 감독을 응원하고픈 마음과 끊임없는 요구의 갈림길에서 갈등한 것 같다. 그가 선택의 기로에 서있을 때마다 나는 언제나 어렵고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며 그의 생각을 묻곤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유재학 감독은 자신만의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은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단기적으로는 낭패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긴 안목에서 볼 때 실패라고 할 만한 장면은 없었다. 그는 고비를 맞을 때마다 정면 돌파를 택했다. 타협하거나 읍소하거나 구걸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로 농구 판을 대하면서도 살아남았고 승리자가 되었다.
유재학 감독과는 해마다 시즌 개막을 앞두고 만나 대화한다. 시간을 못 맞추면 전화 통화를 한다. 이 대화는 내가 농구 기자 생활을 그만둔 뒤로도 변함이 없다. 그는 언제나 침착한 태도로 시즌을 맞았다. 침착함을 넘어 겸손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유 감독에게는 오랜 팬들도 모르기 십상인 일면이 있다. 강인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유 감독의 내면에 자신에 대한 끝없는 회의와 두려움,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의심과 같은 것들이 서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승부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약점이 될 수 있다.
유 감독은 준비가 철저한 코치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신경을 써서 준비한다. 심지어 상대방이 작전을 알아챌까봐 시즌 초반 독일어로 작전번호를 매겨 사용하다 중반이 되자 바꾸기도 했다. 양동근이 “쯔바이, 쯔바이!”를 외치며 동료의 움직임을 요구하는 장면은 퍽 재미있었다. 그런데 유재학 감독의 남다른 면은, 자신의 준비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 있다. 'A라는 작전은 상대가 여간해서 대응하기 어렵지만, B라는 선택으로 돌파가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와 정답을 모두 아는 교사에 비할까.
그러니까 유재학 감독에게는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두들겨 맞기 전까지는.”이라는 말을 갖다 댈 수 없다. 깔끔하게 옷 한 벌을 맞추었지만 팔꿈치가 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거기 섀미가죽(chamois leather) 같은 걸 덧대 놓는 것이다. 이렇게 견고한 지휘자는 여간해서 무너뜨리기 어렵다. 이 견고함 덕에 유재학 감독과 모비스는 선수 구성이나 팀의 경기력이 경쟁자들에 비해 우세하지 못할 때도 뛰어난 경기를 할 수 있었다. 구단의 팀의 체질처럼 자리 잡은 모비스의 컬러는 다가오는 시즌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컵 대회 경기를 많이 보지 못했다. 그래도 전희철 감독이 SK의 지휘봉을 잡고 첫 결실을 얻는 장면은 감명 깊게 지켜보았다. SK 선수들은 결승전에서 특히 눈부신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김선형이 덩크를 시도하는 장면을 보고는 가슴이 뭉클했다. 뛰어난 선수가 부상을 딛고, 시련을 이겨내고 돌아와 다시 한 번 자신의 탁월함을 증명하는 과정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SK는 강한 팀이고, 모비스를 상대로도 좋은 경기를 할 것이다. 요컨대 2021-22시즌에도 유재학 감독과 모비스는 험난한 여정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모비스도 나쁘지 않은 진용을 갖췄다. 가드 이현민은 신뢰할 수 있는 베테랑이고, 서명진은 많이 성장했으리라고 기대한다. 함지훈, 장재석도 경쟁력을 지녔다. 기사에서 언급된 이우석과 김국찬에게도 기대를 걸 수 있다. 외국인 선수를 고르는 유재학 감독의 안목이 워낙 뛰어나니까, 모비스가 순위표의 위쪽에서 경쟁할 가능성은 늘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팀이든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지난 시즌 챔피언을 다툰 KCC와 KGC는 변함없이 강할 것이고 그 밖의 팀들도 싸울 준비를 마쳤을 테니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나는 유재학 감독의 경쟁자는 유 감독 자신이라고 언제나 생각해 왔다. 그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앞서서 걷고 있다. 그가 거두는 1승, 1승이 모두 우리 농구 역사에 기록이 된다. 그는 우승을 해볼 만큼 해봤고, 무수한 경쟁에서 승리해왔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아니 유 감독 자신이라도 이제 더 도전해 볼 만한 목표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필자는 “언젠가 저 사람에게도 한계상황이 올지 모른다. 지휘봉을 들고 있을 만한 동기를 찾지 못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라고 우려해왔다.
오늘(24일) 유재학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한 인간의 탁월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뛰어난 승부사에게는 뛰어난 예술가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재능이 있다. 그것은 사물과 현상을 언제나 낯설게 바라보는 시각이다. 유 감독의 탁월함은 다가오는 시즌을 지난 시즌의 연장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최초의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시각과 감수성에 있다. 이 재능이 그를 뛰어난 승부사로 만들고, 도전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눈부신 업적을 쌓을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유재학 감독이 ‘설렘’을 말할 때, 경쟁자들은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앞에 놓고 하루 일과표를 짜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을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계속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 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 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 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언제고 돈이 적으나 밤이 늦으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교회에 다닌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여행을 떠나던 날 차표를 끊던 가슴 뜀이 식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뛰어난 작가요 시인이었던 정채봉 선생이 쓴 ‘첫 마음’이다. 정 선생의 산문집에 실린 글인데, 어렵지 않은 문장 속에 진실을 담아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조금 과장한다면, 유재학 감독은 너른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나그네다. 그의 앞에는 그저 ‘미지’의 세계만이 펼쳐졌을 뿐이다. 그 길을 두려움 없이 걷는다면, 첫날의 설렘과도 같은 고요한 기대 속에서 첫 마음으로 시즌을 맞고 한 경기 한 경기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날마다 새롭고 깊고 넓은 유재학 농구를 한동안 더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도.
허진석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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