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도 못본 독일 파시즘의 길..기술감시 '코로나 전체주의'는 얼마나 다를까? [책과 삶]

이혜인 기자 2021. 9. 24.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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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이종인 옮김|페이퍼로드|688쪽|3만3000원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19~1939년, 약 20년의 시간을 거치며 독일은 패전국에서 추축국으로 탈바꿈했다. 이 시기에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많은 여행객들이 독일을 찾았다. 학생, 정치인, 음악가, 외교관, 학자, 언론인, 일반인 관광객 등 다양한 사람이 독일 땅을 밟았다. 나치의 싹이 자리잡고 틔워지기 시작한 시기였으나, 많은 여행객들에게 독일은 대체로 아름답고 활기 넘치는 매력적인 나라였다.

방문객들은 바이마르 독일의 다양한 예술과 높은 품질에 경탄했다. 영국인 텔마 카잘렛은 1920년대 후반 베를린을 여행하면서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베를린은 흥미로운 도시이다. 멋진 그림들이 많다. 다양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지만 값이 너무 비싸다. 사람들이 흥미롭다. 정부 보조를 받는 세 개의 오페라 극장은 매일 밤 만석이다. … 살아가기에는 멋진 시대다!” 1936년 열렸던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했던 수구 선수 허버트 와일드먼은 독일인들이 외국인에게 우호적이고 친절했다고 회고했다. “이 사람들은 이 멋진 강의 강변에 서서 내내 모든 팀에 세레나데를 불러주었다. 내가 봤던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 아니었나 싶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독일은 나치즘의 풍경과 오락거리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여행지였다. 동성애자들의 명소였던 베를린의 나이트클럽. 페이퍼로드 제공


“2차 대전 발발 전의 제3제국(나치 독일)을 여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당시에 벌어지는 일의 진상을 파악하고,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본질을 명확히 인식하며, 나치 당국의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고, 더 나아가 유대인 대학살을 예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여행객들의 기록을 보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영국의 노련한 조사연구자이자 작가 줄리아 보이드가 쓴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은 이 같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보이드는 양차 대전 사이에 독일을 여행한 외국인들의 일기와 편지, 외교문서, 언론보도, 미발간 도서 등의 기록을 뒤졌다. <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은 ‘히틀러 시대의 독일 전체’ 그림을 마치 CCTV를 모아서 꿰맞추듯이 재현한다. 저자는 여행 기록을 읽다보면 “제3제국의 복잡한 사정과 구조, 그 역설과 모순, 그리고 그 제국의 최종적 멸망에 대해 신선한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호화 유람선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에서 수영을 하는 관광객들. 페이퍼로드 제공
1937년 독일 노동자와 가족들이 타고 선상 여행을 떠났던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 극장과 살롱, 수영장까지 갖춘 2만5000톤급 유람선이다. 페이퍼로드 제공

독일은 1차 대전에 패하면서 해외 식민지를 잃고, 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했으며, 연합국의 손해에 대한 배상금을 물기로 했다. 이 같은 내용의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1919년 이후 독일을 여행한 사람들은 상반된 풍경을 마주했다. 여행자들은 독일의 자연경관에 감탄하거나 “독일인들이 불운한 운명을 흔쾌히 받아들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꾹 참으며 살아가는 자부심 높고 근면한 국민”이라는 긍정적 인상을 받았다. 동시에 패전 이후 굴욕감과 생활고에 시름하는 사회를 목도했다. 식량 배급을 위한 인도적 목적으로 독일을 찾은 영국의 퀘이커교도 조앤 프라이와 동료들은 “어디를 가든 석탄 부족 문제가 집요할 정도로 끈덕지게 나타났다”고 회상했다. 석탄 부족으로 기차가 몇 시간 멈춰서자 독일인 역장은 “프랑스와 영국이 석탄을 다 가져가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기차를 운행할 수가 없어요”라고 토로했다. 1923년 하이퍼인플레이션이 극에 달했을 때 베를린을 여행한 바이올렛 보넘 카터는 중산층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서 커다란 동정심을 느꼈다. 중산층 전문직조차 전후에 일할 곳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렸고, 인플레이션은 그들의 저축을 모두 녹여버렸다. 저자는 카터의 기록을 토대로 “의사, 변호사, 교사 같은 중산층 인사들은 굶어죽는 수치를 당하기보다 독약을 먹고 죽는 것을 더 선호했다”고 전했다.

독일 관광을 간 유명인들이 묵던 베를린의 아들론 호텔. 페이퍼로드 제공
히틀러 시대 독일의 관광 홍보 포스터. 페이퍼로드 제공


패전으로 인한 물자 부족과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생활고는 나치 집권의 사회적 토양이 됐다. 1930년에 베를린의 빈민가 공동주택에서 살고 있던 영국의 소설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여기에 역사의 수프가 설설 끓고 있었다. … 베를린의 국물에는 실업, 영양실조, 증권가 붕괴,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증오, 기타 강력한 구성 요소 등이 재료로 들어가 설설 끓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여행자들의 기록에는 히틀러가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가는 풍경들이 담겨 있다. 주독 영국대사의 딸인 콘스탄티아 럼볼드는 1933년 1월30일 히틀러의 총리 취임 직후에 벌어진 장대한 횃불 행진을 침실 창문으로 지켜봤다. “횃불의 행렬이 번쩍거리는 뱀처럼 거리를 통과했다. … 그날 밤 독일의 모든 청년들이 행진에 나섰다. 갈색 셔츠를 입은 그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서 6열 종대를 이루어 앞으로 나아갔다. 행진은 다섯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나치의 행진곡 ‘독일아 깨어나라, 유대인이 오고 있다’를 불렀다. 콘스탄티아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번들거리는 승리의 도취감”이 어렸었다고 느꼈다. 1933년 5월10일 독일 대부분의 대학에서 나치당원들은 ‘비독일적’이라고 여겨지는 책들을 태우는 ‘책 화형식’을 거행했다. 베를린 베벨 플라츠 광장에도 책 화형식을 구경하러 4만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나치 선전장관인 파울 괴벨스는 행사 말미 연단에 올라 이렇게 외쳤다. “유대인의 문화는 사망했습니다. … 독일의 영혼은 다시 그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틀러 청년단 단원 수백 명이 1937년 뉘른베르크 집회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들으며 나치식 경례를 하고 있다. 페이퍼로드 제공


하지만 수많은 여행객들의 기록 중 나치즘의 심각성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문제의식을 느낀 기록은 많지 않았다. 저자는 “책 화형식 사건 등은 모든 예비 여행자에게 새로운 독일의 현실을 의식하게 만들었을 것”이지만, “그들이 실제로 독일 현지에 가보니 나치의 프로파간다가 전국 방방곡곡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고, 진실은 극히 왜곡되어 많은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관하여 확신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치 독일은 관광을 적극적인 프로파간다 도구로 삼았다. 주요 인사들에게 나치 독일이 볼셰비즘과 공산주의를 물리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강대국의 중산층은 독일을 저렴한 비용에 자식들을 유학시킬 수 있는 곳으로 여겼다. 저자는 독일이 매력적인 관광지이자 유학지라는 이유로 방문객들이 나치 독일의 현실에 애써 둔감해지려 했다고 지적했다. “독일 문학, 음악, 철학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수많은 관대한 부모가 자식들을 나치 독일로 보내 공부시켰다. 끔찍한 것을 저지르는 나치 정권은 오래 갈 것 같지 않았고, 독일 문화와 언어는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 영국 귀족에 관해 말해보자면, 그들은 떼 지어 자기 자식을 나치 독일로 유학시켰고 그중 다수가 공공연하게 히틀러를 칭찬했다.”

1936년 2월 열린 베를린 동계 올림픽 개막 축포를 쏘아올리는 장면. 페이퍼로드 제공
베를린 올림픽 성화를 든 단독 주자가 완벽하게 통제된 대규모 군중 사이로 올림픽 주경기장 제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올림픽 성화는 10만 명 정도의 관중 앞에서 점화됐다. 페이퍼로드 제공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히틀러의 선전 기관은 올림픽 기간에 포스터를 무수히 제작했다. 이 포스터는 독일의 끈기와 힘을 보여주는 취지다. 다른 포스터들은 외국인들에게 나치의 ‘박애’를 확신시키기 위해 제작됐다. 페이퍼로드 제공


저자는 “유대인 박해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면 그건 곧 미국 흑인 문제와 자동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미국인 관광객들이 인종차별 문제를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도 꼬집었다. 영국의 작가 시슬리 해밀턴은 나치 지지자는 아니었으나,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며 대변했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증오의 주된 원인이 ‘질투’일 뿐이라고 과소평가했다. 스위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드 루즈몽은 “자유로운 유럽인 타입 유대인”과 “세속적이고 오만한 유대인”을 구분지으며, 유대인 박해의 원인을 유대인에게서 찾으려 했다. 저자는 이에 날선 비판의 시선을 보낸다. “나치의 악랄함은 독일 사회의 모든 측면에 이미 스며들어 있었지만, 그 악행이 외국인 방문객들에게는 여전히 허용되는 매력적인 즐거움과 뒤섞여서 정체가 모호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본질은 벌레 먹은 장미처럼 아주 흉측한 것이었다.”

책의 후반부는 2차 대전 발발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독일을 떠나려는 외국인들의 기록으로 마무리된다. 많은 여행객들은 차별과 혐오가 고조되는 사회 분위기를 애써 무시하고 친절한 독일인과 아름다운 풍광에만 집중하려 했지만, 결국은 독일을 떠나야 했다. 멀쩡해보였던 한 사회가 파시즘과 인종주의에 서서히 물들어가며 최악의 결론으로 치닫는 중에도 그 당시를 살고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제3자적 관점을 가진 여행객들조차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느끼지 못했다. 감시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더 높아지는 가운데, 인권 보호가 유예되기 일쑤인 지금, 어쩌면 ‘코로나 전체주의’도 말끔한 일상의 얼굴을 하고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지만, 우리가 여행객처럼 무심하게 흘려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이혜인 기자 hye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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