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만 지워진 인디언들, 그 존재 증명을 위한 소설 '데어 데어' [책과 삶]

선명수 기자 입력 2021. 9. 24. 15:13 수정 2021. 9. 24.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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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데어 데어

토미 오렌지 지음·민승남 옮김|문학동네|372쪽|1만5000원

“거기엔 그곳이 없다(There is no there there).” 미국 작가 토미 오렌지의 소설 <데어 데어>의 제목은 거트루드 스타인이 한 이 말에서 나왔다.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스타인은 그의 책 <모두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더 이상 옛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는 의미로 이 문장을 썼고, 토미 오렌지는 이 말이 아메리카 원주민이 처한 현실에 꼭 들어맞는다고 생각해 소설의 제목으로 가져왔다고 한다. 역사에서도 현실에서도 그 존재가 삭제된 원주민들에게 미국은 현재 발 딛고 있는 땅이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소설은 1939년 어느 무명화가가 그렸다는 한 인디언의 머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흔히 ‘인디언 머리 테스트패턴’으로 불린, 한때 미국 전역에서 TV 방송이 모두 끝난 후 화면 조정 시간에 떠올랐던 이미지다. 긴 머리카락에 깃털 장식을 쓴 채 허공을 응시하는 인디언 머리 그림은 마치 과녁처럼 보이는 커다란 원 안에 위치해 있었다. 소설은 이 테스트패턴을 시작으로 “슬프고 패배한 인디언의 실루엣” 이야기를 이어간다. 미국인들에게 국가적인 명절이지만 원주민들에겐 학살의 역사인 추수감사절, 이 명절처럼 이른바 ‘성공적인 학살’이 벌어질 때마다 열린 잔치들, 그 과정에서 전리품처럼 훼손되고 전시된 수많은 인디언의 머리들. 500여년간 계속된 절멸의 역사는 끝이 났지만, 그 머리의 이미지는 과녁판의 표적처럼 남아 1970년대 후반까지 전파를 탔다.

미국의 신예 작가 토미 오렌지의 소설 <데어 데어>는 미국 오클랜드를 배경으로 12명의 ‘도시 인디언’의 삶과 고뇌를 강렬하게 그려보인 작가의 데뷔작이다. 사진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통 행사이자 이 소설의 종착지이기도 한 ‘파우와우(PowWow)’ 축제 모습.


소설은 땅을 빼앗긴 데 이어 존재마저 지워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강렬한 현재 시제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인디언 머리’에 담긴 비극적인 역사를 압축한 프롤로그를 넘기면, 오늘의 미국을 살아가는 ‘도시 인디언들’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우리를 도시로 데려가는 건 500년의 종족 학살 작전을 마무리하는 동화, 흡수, 말살의 필수적인 최후 단계였다. 하지만 도시는 우리를 새롭게 만들었고, 우리는 도시를 우리 것으로 만들었다.”

소설은 오클랜드를 배경으로 ‘도시 인디언’ 열두 명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이어진다. 노년에 접어든 인디언 자매와 빈곤과 폭력에 노출된 원주민 청년들,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내려는 어린 춤꾼까지. 백인 어머니와 원주민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는 ‘인디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단 하나의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대다수의 원주민이 인디언 보호구역이 아니라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원주민의 삶은 인디언 머리 테스트패턴처럼 정형화된 이미지를 넘어 다채로울 수밖에 없고, 작가는 그 복잡다단한 삶의 이야기를 열두 명의 인물에 불어넣었다.

작가 자신처럼 부모 중 한 쪽만 원주민인 누군가는 “오바마가 흑인인 것만큼 나는 원주민”이라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다른 누군가는 스스로를 겉은 붉고 안은 흰 사과처럼 “문화가 없는 난민”이라고 규정한다. 그런가 하면 앨커트래즈섬 점거(1969~1971년 인디언부족연맹이 샌프란시스코만에 있는 앨커트래즈섬을 점거한 인디언 행동주의 운동)를 경험했던 원주민 여성은 끊임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것”만이 자신들을 지워버린 세상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다른 건 없고 오직 이야기들뿐이라고, 그리고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들뿐”이라는 이 여성의 말처럼,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 땅에서 존재하지 않는 민족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치열하고 절박한 존재 증명과도 같다.

<데어 데어>의 저자 토미 오렌지.


“우리는 서로 다른 이유로 빅 오클랜드 파우와우에 왔다. 우리의 어지럽고 위태로운 삶의 가닥들이 하나로 땋아졌다. 이곳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해온 모든 일들이 이곳에서 하나로 묶였다. 우리는 먼 길을 왔다. 기도와 손으로 짠 전통 의상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여러 해를, 여러 세대를, 수많은 이들의 평생을 거쳐 왔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열두 명의 이야기는 하나의 종착지를 향해 나아간다. 열두 인물이 소설의 끝에 다다르는 장소이자 자기 자신도 모른 채 서로를 연결해주는 매개인 원주민들의 전통 행사, ‘파우와우(PowWow)’를 향해서다.

인물들은 각자의 이유로 거액의 상금이 걸려있는 ‘빅 오클랜드 파우와우’에 참석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다. 한 발의 총성을 시작으로 축제의 장은 처참한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가 얽혀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소설은 파우와우 축제날 벌어진 사건을 묘사하며 끝을 맺지만, 이 비극 속에서도 선명한 것은 애처롭게 박제된 인디언의 형상이 아니라 비극을 뚫고 나올 만큼 강인하고 생명력 있는 이들의 목소리다.

작가 토미 오렌지는 2018년 발표한 이 데뷔작으로 이듬해 펜헤밍웨이상과 미국도서상 등을 수상했고 퓰리처상 소설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주목받았다. 소설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실로 경이로운 데뷔작”이라고 평했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미국의 여러 언론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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