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조선·르네상스까지..9m 캔버스에 펼쳐진 美의 향연
유상옥 회장, 라미화장품 재직 시절
美 엘리자베스아덴 본사 그림에 영감
86년 '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 제작
유홍준 기획으로 민중 화가 5인 참여
신윤복 '미인도' 보티첼리 '비너스의 탄생' 등
철저한 고증·섬세한 필력으로 구현한 거작
이천공장서 33년만에 코리아나로 옮겨
미국의 화장품 전문 기업 엘리자베스아덴은 사옥뿐 아니라 생산 공장 등지에도 예술 작품을 설치해 임직원들에게는 영감을, 방문객에게는 기업 정체성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유상옥(88) 코리아나화장품 회장은 지난 1985년 10월 당시 동아제약 자회사였던 라미화장품 대표이사 자격으로 방문한 엘리자베스아덴 미국 본사에서 접견실에 걸린 그림 한 점에 마음을 빼앗겼다. 황금색 바탕의 대형 그림 속에서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자신을 치장하고 있었다. 옛 여인이 등장하는 미인도를 회사 로비에 걸어두는 이 회사의 아이디어에 놀란 유 회장은 ‘우리에게도 이런 문화적 자산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봄 그는 한국미술사 강의를 들으며 친분을 쌓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을 만나 이 같은 속내를 얘기했다. “우리도 미인도를 벽화로 제작하면 어떨까요?” 1959년 동아제약 공채 1기로 입사해 1977년부터 라미화장품을 맡아온 유 회장은 마침 그해 가을 완공될 이천 새 공장에 그간 모아온 화장 관련 유물을 전시할 약장(藥粧)사료관 개관을 준비하고 있었다. 화장품 공장 로비에 미인도가 내걸리면 더할 나위 없을 터였다.
유 전 청장은 반색하며 총기획을 맡았다. 동서양미술사에 해박한 지식을 총동원해 다양한 유물과 미인도를 조사하고 이를 재구성했으며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을 이끈 작가들이며 필력으로는 어디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김용태(1946~2014), 김정헌(75), 홍선웅(69), 박불똥(65), 이인철(65)에게 작업을 제안했다. 화가들은 뜨거웠던 1986년 여름 한철을 가로 9m, 세로 2m(800호 크기)의 초대형 그림에 매달렸다. 세상은 어지럽고 민주화 운동이 치열했던 시절에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9월에야 완성된 ‘동서고금 화장하는 미인도’는 라미화장품 이천 공장의 벽 하나를 통째로 차지했다. 세상을 놀라게 했고 언론의 주목도 받았다.
지금 이 그림은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센트럴타운로에 위치한 코리아나화장품 광교사옥 1층 로비로 자리를 옮겼다. 연노랑 바탕색이 빛을 내뿜는 듯해 정문에서부터 그림의 기운이 느껴진다. 유 전 청장과 작가들은 이 벽화를 고대 이집트, 중국 남북조시대, 유럽의 르네상스, 조선 영정조 시대, 서양의 로코코 시대와 20세기 등 6개 장면으로 구성했다.
로비 맨 안쪽에 해당하는 그림의 왼쪽 끝에서 고대 이집트의 최고 미인으로 사랑받는 네페르티티(기원전 1360년 무렵) 여왕이 화장을 하고 있다. 청동거울을 들여다보며 막 입술에 연지를 찍었다. 앞에는 거울을 받쳐 든 시녀가, 좌우 양쪽에는 화장품을 손에 올린 시종들이 앉았다. 하프 연주자의 모습은 치장하는 왕비의 설레는 마음을 더욱 끌어올린다. 유 전 청장의 설명에 따르면 네페르티티 왕비의 초상은 베를린 신박물관이 소장한 왕비의 흉상을 근거로 했고 거울을 보며 앉은 자세는 투린박물관에 소장된 파피루스의 그림에서 따 왔다. 작은 장식장은 카이로박물관이 소장한 투탕카멘의 무덤 유물에서, 왕비의 의자는 투탕카멘의 왕좌 뒤판에 있는 그림에서, 고양이와 송골매는 대영박물관의 이집트 청동 조각에서 각각 형태를 빌려왔다. 여왕의 머리 위쪽, 저 멀리서 질주하는 마차에는 투탕카멘이 타고 있다. 그의 활이 겨누는 쪽의 소는 우유와 고기뿐 아니라 미용에 쓰이는 오일을 운반하던 존재로 화장과 관련이 있다. 그 옆 기이한 자세의 남녀들은 이집트식 미용체조를 하고 있다.
화장하고 머리를 다듬는 중국 여인도 보인다. 한(漢)나라 몰락 이후 350년에 걸친 중국의 혼란기를 남북조시대라고 하는데 그 시기 최고의 화가가 4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고개지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고개지의 ‘여사잠도(女史箴圖)’는 여인의 화장과 몸가짐·마음가짐에 대한 교훈적 내용을 담고 있다. 유 전 청장은 이 그림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얼굴을 칭찬하는 법은 알면서도 영혼을 찬미하는 방법은 잘 알지 못한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가 지닌 대로 아름다워야지, 꾸며서 바꾸면 허물이 된다’는 잠언을 강조했다. 흰옷 입은 여인이 깔고 앉은 호피부터 석류가 담긴 작은 상 등은 이 시대의 유물을 고증해 그렸다. 이들의 뒤로 값진 비단·향수·보석을 낙타 등에 실어 나르는 당(唐)나라 실크로드 행렬이 지난다.
산드로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중 한 장면은 원작이 워낙 유명해 알아보기 쉽다. 그 옆에 나신(裸身)으로 멋쟁이 초록 모자를 쓴 비너스는 독일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그림에서 따 왔다. 그 아래 수사슴을 끌어안은 여인은 16세기 프랑스 화가 장 구종이 신화를 그린 ‘수사슴과 디아나’를 차용했다. 이들 옆 테이블은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궁정 유물로 그 위에 놓인 조각상은 당시 유행한 머리 치장을 보여준다. 그들의 뒤쪽으로는 르네상스 시기에 영국을 지배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모든 이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화려한 옷을 입고 눈 화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림의 한가운데는 신윤복의 미인도가 차지했다. 커다란 트레머리 가채를 얹고 단장하는 여인, 단오를 핑계 삼아 목욕하러 나온 여인들 모두 신윤복의 그림에서 빌려왔다. 이어지는 장면은 18세기 유럽 로코코 시대 귀족들의 호화스러운 취미 활동이다. 절대왕정을 이끌던 루이15세의 정부 퐁파두르 부인의 모습은 그 시기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부셰의 그림을 통해 확인했다. 그 건너편에서 진격하는 나폴레옹의 시선은 노란 드레스의 조세핀에게 향해 있다. 나폴레옹이 남긴 “남자는 세계를 지배하지만 여자는 그 남자를 지배한다”는 말의 주인공이다. 그림은 흰옷 입은 20세기 미인상으로 마무리된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 대칭적 문양이 은유하는 지성미가 그를 떠받치고 있다.
유 전 청장의 세부 고증도 놀랍지만 이를 구현한 화가들의 실력도 빼어나다. 참여 작가는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활동한 주재환·신학철·오윤·임옥상 등과 함께 민중미술 경향을 대표한다. 작품들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난 김용태는 1970~1980년대 유신과 군부독재 상황에서 가장 활발히 목소리를 낸 화가 중 하나다. 동두천 일대 사진관에서 수집한 미군들의 기념사진 180여 점을 콜라주한 ‘DMZ’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김정헌은 대중매체 속 이미지를 차용해 분단 상황의 모순, 민중과 농민의 삶 등을 다루며 사회적 문제에 적극 대응했고 문화운동가로 활동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도 지냈다. 박불똥은 뉴스나 대중매체 이미지를 풍자하고 서구 문명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당대 현실을 비판적으로 묘사하는 사진 콜라주 작업을 선보였다.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목판화로 더 유명한 홍선웅은 조선 시대 민화와 전통 회화를 재해석하는 데 탁월했고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먹판화로 재창조한 ‘진경판화’로 주목받았다. 역시 판화에 몰두했던 이인철은 단순화한 이미지를 거칠고 투박한 윤곽선으로 표현해 그림에 강력한 목소리를 담았고 최근에는 디지털 이미지 작업으로 폭력적인 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시대의 역작인 이 거대한 그림이 지금의 자리로 오기까지는 사연 하나가 더 있다. 사비를 털어 그림을 제작한 유 회장은 1988년 독립해 코리아나화장품을 창업한 뒤 새 사업에 몰두했다. 그림을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렇게 공장에 남겨진 벽화는 30여 년간 방치됐다. 창업 30주년을 맞은 2018년에야 유 회장은 지금 제약 공장으로 쓰이는 이천 공장을 다시 찾았다. 미인도 벽화가 무사함을 확인한 그는 큰 결심을 하고 강신호 동아제약 회장을 찾아갔다.
“회장님 덕분에 동아제약에서 30년의 긴 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고 그 후 회사를 창업한 최고경영자(CEO)로서 경영과 박물관 운영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천 공장이 건립 당시에는 화장품 공장이었지만 지금 제약 공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그때 제작한 미인도는 저희 회장품 회사에서 보존하는 것이 어떨까요?”
강 회장은 “당신이 만든 것이니 당신이 가져가는 게 옳다. 이전해서 잘 관리하기 바란다”며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하여 그림은 제작된 지 33년 만에 코리아나화장품 광교사옥 로비로 옮겨졌다. 사무용 건물이지만 1층 로비는 외부인에게도 공개해 누구나 그림을 보러 들어갈 수 있다.
미인도 맞은편에서는 독일의 유명 화가 랄프 플렉의 작품도 볼 수 있다. 경기장에서 응원하는 군중을 그린 것으로 찐득한 물감을 써 눈코입을 생략하고 단순화했는데도 수십 명의 개성이 하나하나 살아 있는 게 특징이다. 그 옆에는 화가 이원희가 그린 유 회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빼어난 시대의 미인도, 묻혀 있는 군중의 아름다움도 모두 귀중하다는 그의 마음이 눈빛에서 읽힌다.
수원=조상인 미술전문기자 ccsi@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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