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스포츠 人] 금빛 등정 이뤄낸 '스파이더걸', 스포츠클라이밍 서채현
(MHN스포츠 권수연 기자) 영화 '스파이더맨' 에는 맨 손으로 고층 빌딩을 올라가는 히어로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
직역하면 '거미인간' 이라는 뜻을 가진 스파이더맨은, 보기만 해도 아찔해보이는 수십미터 건물을 거미처럼 자유자재로 기어오른다. 사람들은 그런 히어로의 모습에 전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당연히 비현실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난 달 8일 막을 내린 2020 도쿄 올림픽은 비현실을 현실로 펼쳐냈다. 전 세계 '거미인간' 들이 몰려와 경합을 펼쳤다.
팔다리가 압도적으로 길고 악력이 센 서양 선수들도 뚝뚝 떨어지는 인공암벽을 당차게 기어오르는 조그만 한국 소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162cm, 만 17세의 어린 나이로 스포츠클라이밍 리드 세계랭킹 1위에 오른 서채현(신정고)이다.
서채현 이전, 여자 스포츠클라이밍 부문에서 김자인을 따라올 선수는 국내에 아무도 없었다. '암벽 위의 발레리나' 라고 불리던 세계랭킹 1위 김자인은 차기 유망주 서채현에게 도쿄올림픽 출전권을 양보했다. 결혼과 임신으로 공백이 길었고, 지난 3월 득녀하며 육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바통을 이어받은 서채현은 올림픽 무대에서 기량을 아낌없이 선보이며 '제 2의 김자인' 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이스클라이밍 국가대표 출신 아버지와 스포츠 클라이머인 어머니를 둔 서채현은 7살때부터 자연스럽게 암벽을 올랐다. 부모님이 스포츠클라이밍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니 연습장이 곧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초등학생때부터 전문적인 훈련을 받기 시작한 그는 곧장 두각을 드러냈다.
서채현은 지난 2018년 중국 충칭에서 열린 청소년 아시아선수권 대회 유스 B에서 볼더링 은메달, 리드 금메달을 획득하며 재능을 입증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
지난 2019년 스위스 빌라르에서 열린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이하 IFSC) 7차 월드컵에서는 리드 2위를 기록했다. 이어 같은 해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는 리드와 볼더링 부문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그 뒤로 열린 8,9,10,11차 월드컵을 몽땅 우승하며 10대라고는 믿기지 않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서채현만을 위한 '1위 행진곡' 은 끝없이 이어졌다. 지난 2020년 전국 스포츠클라이밍 선수권에서 컴바인 1위를 기록한 그는 2020 도쿄 하계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서채현은 주 종목이 아닌 스피드에서 9.85초로 본인의 신기록을 또 한번 깼다. 볼더링에서 7위로 조금 아쉬운 성적을 냈지만 특기인 리드 부문에서는 1위 선수와 2홀드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종합 성적은 결선 8위였다.
자신을 넘어서고도 올림픽 성적이 아쉬워 울먹이던 '거미 소녀' 는 이를 악물고 투혼했다. 노력은 금빛 보답으로 돌아왔다. 지난 22일(한국시간) '2021 모스크바 세계선수권대회' 에서 리드 부문 금메달이라는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한국 여자 선수가 세계선수권 리드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지난 2014년 김자인 이후 두 번째다.
예선과 준결승에서 모두 최종 홀드인 톱(TOP)을 찍고 결승에 오른 서채현은 8명 선수 중 마지막 8번째로 나섰다. 그리고 홀로 당당히 완등에 성공했다.
당시 해설위원은 "정말 믿을 수 없다, 우린 자리에 앉아서 마스터 클래스의 등정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그는 금메달을 예약했다" 며 서채현의 실력을 극찬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이하 IOC) 또한 SNS를 통해, "2020 도쿄 올림픽에 출전한 서채현이 리드 종목에서 새로운 세계 챔피언이 됐다" 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채현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며 만 17세 나이에 명실상부 리드 부문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다가올 2024 파리 올림픽에서는 스피드가 분리되고 볼더링과 리드만을 합산해 순위를 가리는 방식으로 규칙이 변경된다. 상대적으로 약한 종목인 스피드가 빠지며 서채현의 메달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세계선수권에서 처음 딴 메달이 금메달이라 좋다" 고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서채현의 얼굴은 아직도 한참 애띠다. 차후 파리 올림픽이 열려도 그의 나이는 갓 20세에 불과하다. 가능성은 무한하며, 서채현의 몸과 실력은 지금도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팬들은 벌써부터 서채현을 '차기 클라이밍 여제' 로 부르며 하얀 초크가 묻은 손으로 차근차근 짚어나갈 금빛 등정을 응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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