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지배하는 세계를 위한 추리소설

한겨레 2021. 9. 24. 05:06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20세기 러시아 에스에프(SF)의 거장으로 꼽히는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죽은 등산가의 호텔> 은 눈 덮인 산장이라는 고전 밀실 상황을 다루는 추리소설이지만, "추리 장르에 바치는 또 하나의 임종 기도"를 표방한다.

그렇다면 뒤렌마트든 스트루가츠키 형제든 추리소설의 장송곡을 썼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결국은 이들이 시도한 것은 고전과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의 추리소설이며, 후대의 우리가 보기엔 이제 이런 실험은 새롭다기보다 우연의 세계에서 논리를 찾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한겨레Book]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죽은 등산가의 호텔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보리스 스트루가츠키 지음, 이경아 옮김 l 현대문학(2021)

20세기 러시아 에스에프(SF)의 거장으로 꼽히는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죽은 등산가의 호텔>은 눈 덮인 산장이라는 고전 밀실 상황을 다루는 추리소설이지만, “추리 장르에 바치는 또 하나의 임종 기도”를 표방한다. 1970년 출간된 이 소설은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뒤렌마트의 1958년 작 중편 ‘약속’을 모범으로 삼았다고 밝힌다. ‘약속’이야말로 부제가 ‘추리소설에 바치는 장송곡’이다. 액자소설인 ‘약속’은 오랫동안 연쇄살인마를 추적한 한 수사관의 집념을 그린다. 결국 수사관은 연쇄살인범의 범죄 패턴을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범인을 잡을 덫을 놓는다. 하지만 범인이 나타나야 하는 약속의 날,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처럼 ‘약속’은 기존 추리소설의 전제를 반박한다. 범죄 수사는 수학처럼 법칙을 따르는 정밀한 과정으로 보이지만, 우리 세계는 임의성에 지배되기에 규칙을 벗어나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죽은 등산가의 호텔>이 가는 길도 짐작할 수 있다.

<죽은 등산가의 호텔>의 주인공은 번잡한 범죄 수사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2주간 휴가를 즐기러 온 페테르 글렙스키 경위이다. 추리소설에서는 전형적인 ‘버스 운전사의 휴가’이다. 즉, 휴가를 떠났지만 결국은 자기 본업과 동일한 일을 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전에 눈사태에 휩쓸린 등산가를 기려 이름을 지은 이 호텔에는 주인인 스네바르, 하녀인 카이사 말고도 여러 이상한 손님들이 묵고 있다. 마술사, 그의 조카, 물리학자, 부유한 사업가 부부, 수상한 범죄자처럼 보이는 남자, 바이킹처럼 운동능력이 뛰어난 남자. 그리고 눈사태를 헤치고 나타난 사람. 여기서는 여지없이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글렙스키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 뛰어다닌다.

책 말미에 실린 후기를 보면, 이 소설은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흠결인 빈약한 동기와 구구절절한 과정 설명을 뛰어넘겠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결국 작가들은 자신들의 실험은 실패였다고도 순순히 인정한다. 그래도 재미있는 소설을 써냈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대체로 동의할 만한 자기평가이다. <죽은 등산가의 소설>은 밀실 미스터리의 전형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나름대로 기발한 반전을 꾀했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주인공 글렙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오컬트나 판타지의 개념을 이용하면 어느 범죄든 진상을 설명할 수 있고 언제나 몹시 논리적입니다. 하지만 이성적인 사람은 그런 논리는 믿지 않죠.”(337쪽)

50년 후의 추리소설 독자가 보기에는 꽤 흥미로운 발언이다. 현재의 추리소설은 오컬트나 판타지 장르와 결합하고, 에스에프적인 전개 또한 드물지 않다. 질서정연한 세계 속에서 엄정한 수사를 통해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뒤집혔지만, 무질서한 세계 속에서도 오컬트나 판타지를 빌려서라도 어떻게든 논리적인 설명을 찾겠다는 절박한 시도가 이어진다. 이것이 현대의 추리소설이다. 그렇다면 뒤렌마트든 스트루가츠키 형제든 추리소설의 장송곡을 썼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결국은 이들이 시도한 것은 고전과 구분되는 새로운 시대의 추리소설이며, 후대의 우리가 보기엔 이제 이런 실험은 새롭다기보다 우연의 세계에서 논리를 찾는 여러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작가, 번역가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