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립과 배제 넘어 동서 교류가 만든 르네상스

한겨레 2021. 9. 2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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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르네상스 연구에 뿌리박은
비유럽 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
경계 허물고 새롭고 풍부한 연구

글로벌 르네상스

동양과 서양 사이의 르네상스 미술

리사 자딘·제리 브로턴 지음, 임병철 옮김 l 길 l 2만8000원

르네상스에서 계몽과 이성의 지배,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시작, 인간의 가치와 개성의 발견 및 발현, 평등한 시민들의 합의와 참여에 의해 굴러가는 공동체 따위의 관념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적어도 30년쯤 뒤처진 것이다. 전문적인 르네상스 연구자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이미 르네상스에 대한 그런 ‘기대’를 접었다.

르네상스에 대한 그런 전통적인 상이 완성된 것은 19세기이다. 우리나라에도 일찌감치부터 번역되어 지금도 읽히는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그 결정판이다. 이 책에 담긴 르네상스에 대한 모든 생각이 부르크하르트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스위스인 학자의 저술은 서술의 대중성이나 체계성, 압축성에서 앞의 유사한 저작들을 뛰어넘었고 출간 뒤 이전 어느 저작도 누리지 못한 성공을 거두었으며 더불어 후대의 르네상스 연구를 거의 백년 동안 지배했다.

르네상스 연구가 붐을 이루면서 부르크하르트가 손에 넣을 수 없거나 읽지 못했던 많은 문헌들이 서고에서 끌려나왔다. 심지어 라틴어나 당시 이탈리아 속어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친절하게 현대어로 번역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부르크하르트와는 판이한 르네상스의 상들이 출현한다.

임병철 한국교원대 교수가 번역한 리사 자딘과 제리 브로턴의 <글로벌 르네상스>(원제는 Global Interests, 즉 ‘글로벌한 관심’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그런 수정주의적 관심에서 비롯한 작품이다. 부제는 ‘동양과 서양 사이의 르네상스 미술’(Renaissance Art between East and West)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르네상스 미술’이 아니다. 저자들의 핵심 문제의식은 ‘동양과 서양 사이’라는 부분에 있다. “르네상스 연구자들은 동양을 소외시켜왔고 낯설게 치부해왔으며, 또한 위험한 것으로 취급해왔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정치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뿐더러 역사적으로도 부정확한 것이며, 그렇기에 이제는 폐기되어야 마땅하다.”(103쪽)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1533). 길 제공

요약하자. 이 작품은 르네상스 미술을 해석하는 기존 패러다임에 동양과 서양을 구분하는 어떤 편견이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제거하려 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15세기와 16세기는 서양이 동양과 끊임없이 교류하는 가운데 동양을 폭력과 야만의 이미지만이 아닌 파트너로서 만나고 이해했던 시기이다. 단지 19세기에 직조된 르네상스의 상(그 대표자가 부르크하르트라는 것은 이미 이야기했다)이 그런 현실을 가렸을 뿐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자신들의 공통 창조물을 “‘문화적 유동성’에 대한 철저한 간문화적(inter-cultural) 연구”(9쪽)라고 부른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다양한 예술작품들에서 동양이라는 비유럽 세력이 남긴 흔적을 찾아내고 이를 재해석하는 가운데 르네상스인들이 동양이라는 타자를 어떻게 표상했는가를 다시금 묻는 것이다.

이들의 야심은 꽤 크다. 20세기 후반 이후 다문화 사회를 맞닥뜨린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은 문화 간의 충돌이 가져올 파국을 우려해왔다. 그들은 비유럽 문화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와 편협한 태도를 제거함으로써 파국을 막는 데 기여하기를 바랐다. 자딘과 브로턴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이러한 분위기와 닿아 있다. 그들은 19세기 이후 근대 유럽의 정체성을 구성해온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르네상스에 대한 서사에 동양에 대한 그런 편협한 이해가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바로 그 대립과 배제의 서사를 제거하고 유럽의 정체성을 새롭게 상상하는 데 기여하기를 원한다. “만약 역사적 편견의 경계를 무너뜨린다면, 낯선 문화적 정체성을 발견하고 그에 기초해 앞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지 어느 누가 알겠는가?”(11쪽)

방대한 수의 인물들과 사실이 등장하기 때문에 비전문가들을 고려해서 좀 더 각주를 달았더라면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그런 장벽을 넘어서는 독자들은 풍부한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해석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서평자는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The Ambassadors)에 대한 해석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1533년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 장 드 댕트빌과 프랑스 왕의 특사 조르주 드 셀브를 그린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아주 친숙하다. 자딘과 브로턴은 거기에 등장하는 대상들(브라질을 보여주는 지구의, 오스만 양탄자)에서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 예를 들어 신대륙의 지배권을 놓고 유럽 국가들이 벌이는 경쟁이라든가 오스만 제국이 한몫을 차지하는 전유럽적인 권력투쟁의 현실과 연관을 찾아낸다. 풍부한 상상력, 박학한 지식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흥미롭다. 이 해석에 반대하거나, 서평자처럼 이런 해석이 정말 동양에 대한 다른 상상력을 보여주는가에 부분적으로 회의를 갖는 이들도 이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페르시아의 예술가 비흐자드가 코스탄초 다 페라라의 그림을 모사해 그린 ‘튀르크 복장을 한 화가의 초상’. 15세기 후반. 길 제공
오스만 궁정에서 여러 해를 지냈던 코스탄초 다 페라라의 그림 ‘앉아 있는 필경사’. 1470~1480년께. 길 제공

르네상스와 도상의 연구자로서, 또 동서교류사에 꽤나 관심을 기울여온 연구자로서 이들의 논의에 아쉬움과 반론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르네상스에 대한 ‘다른 상상력’을 시각예술이라는 흥미있는 소재로 논의했다는 것으로도 이 책의 기여는 작지 않다. 일단 그런 논의가 국제적으로도 흔한 것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르네상스에 대한 ‘부르크하르트’적 주장이 너무나도 상식인 한국에서 이 작품의 번역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르네상스를 둘러싼 국제적인 학술적 논의가 워낙 소개되어 있지 않아서 어차피 역자도 출판사도 엄청난 호응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만큼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다. 사족 같지만 일급의 도상 연구는 문헌과 사건에 대한 세세하고 심층적인 탐구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도 이 책의 기여를 찾을 수 있다. 적어도 입문서 수준의 도상학적 지식에 ‘다빈치 코드’ 수준의 밑도 끝도 없는 상상력을 버무린 소설 수준의 이야기가 대중 교양서나 신문의 칼럼에 버젓이 등장하는 한국에서는 그렇다. 결론: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리겠다. Tolle, Lege!(집어라, 읽어라!)

윤비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윤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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