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메르켈은 '쇼통'이 아니었다
2005년부터 16년간 유럽을 이끈 철의 여인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오는 26일 퇴임한다. 기자는 6년 전 베를린 특파원으로 일할 때 한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메르켈 이야기를 보도한 적 있다. 우리로 치면 광화문 정부청사 근처에 있는 오래된 수퍼였다. 메르켈은 이 수퍼가 생긴 1993년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곳에서 장을 봤다. 정육점 주인, 빵집 아줌마, 계산원들이 같은 자리를 지키며 메르켈의 정치 인생을 지켜봤다.
베를린 중심이라는 위치 때문에 이 수퍼에는 그동안 메르켈뿐 아니라 현직 재무부 장관, 하원 의장, 야당의 거물 정치인이 일상적으로 찾아와 장을 봤다. 그러나 독일과 유럽연합을 쥐락펴락하는 인사이더들의 장바구니를 정작 독일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렌지·루콜라(샐러드용 채소)·가지·양배추·로션·주방용 타월·크림치즈·레드와인·초콜릿·밀가루·토마토소스…. 기자가 엿본 메르켈의 쇼핑 카트 안에는 실제로 별다를 게 없었다.
기사를 쓴 이후 예상치 못한 파급 효과가 있었다. 여러 외신이 최근까지도 메르켈의 단골 수퍼를 종종 언급한다. 메르켈이 2014년 중국 총리를 수퍼에 데려가 함께 장을 본 일화도 새삼 주목을 받았다. 가장 뜻밖의 일은 2017년 5월에 있었다. ‘퇴근길 마트에서 장을 보는 메르켈 총리’에 큰 감동을 받았다는 우리 대선 주자가 나타난 것이다.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방송 연설에서 본지 기사를 언급하고 “저 역시 때때로 계란이나 햇반 같은 것을 사러 동네 마트를 찾는다”고 했다. 이어 “국민과 함께 출근하고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소주 한잔 나눌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선 이후 벌이는 온갖 ‘쇼통 행보’를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각본과 연출에 따라 행동하는 게 뻔히 보이는 ‘쇼통’에 인터넷에선 ‘쇼, 끝은 없는 거야’ 같은 밈(meme·유행 콘텐츠)이 확산했다. 차기 대선이 6개월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또 얼마나 많은 쇼를 시청해야 할지 걱정이다.
6년 전 수퍼 앞에서 메르켈을 기다린 이유는 단순했다. 총리가 직접 장을 보는 일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총리의 사적인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던 경호원, “인터뷰에 응하기 어렵다”고 말하던 메르켈 총리에게 기자는 “미안하다. 이게 내 직업이니 이해해달라”고 설득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래서 확실히 안다. 메르켈이 최소 28년 동안 꾸준히 행한 ‘장보기’는 쇼통이 아니었다.
최근 독일 공영방송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5%가 메르켈 시대를 긍정적으로 평했다고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아름다운 퇴장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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