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모의 외교포커스] 이제 '파이로프로세싱'의 진실을 말해야 할 때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2021. 9. 2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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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한·미 원자력연료주기공동연구(JFCS) 운영위원회가 지난 1일 파이로프로세싱(사용후핵연료 건식재처리)에 대한 보고서를 승인했다. 10년 공동연구의 결과물이다. 국내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미국이 파이로프로세싱을 승인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이 보고서는 오히려 파이로프로세싱이 핵연료 재활용과 핵폐기물 저감 등에 이용하기 어려운 기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봐야 한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보고서 공개 대신 설명자료를 통해 “보고서에 파이로프로세싱의 타당성 등에 대한 결론은 포함되지 않았다.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제안이 들어 있다”고 했다. 연구결과 보고서도 공개하지 않고 추가 연구를 제안한 것은 곧 실패를 의미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10년 전에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미는 2010년에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협상은 곧 중단됐다. 국내 파이로프로세싱 추진파들의 주장을 반영해 협상에 나선 정부가 미국에 파이로프로세싱을 강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 재생 핵연료를 만드는 것이어서 미국의 동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기술적·상업적으로 미완의 기술이었다. 특히 미국은 플루토늄 추출에 따른 핵확산을 우려했다. 기술적·상업적으로 검증되지 않고 확산 위험이 있는 기술을 한국이 강하게 요구하는 것에는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결국 한·미는 10년간 파이로프로세싱 공동연구를 한 뒤 그 결과가 한국의 주장과 부합하면 추후 협정에 반영키로 하고 협상을 재개했다. 연구목적은 기술적 타당성·상업성·확산저항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 국무부 관계자는 이를 “kick the can down the road”(길 위의 깡통을 발로 차 치운다는 뜻)라고 표현했다. 동맹국과 갈등을 빚기보다 공동연구를 통해 한국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협상의 장애물을 제거했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뤄진 공동연구의 결과물이 이번에 나온 연구결과 보고서다. 기술적 타당성·상업성·확산저항성이 입증됐다면 보고서를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 결국 ‘예견된 사실’을 확인하는 데 10년의 세월과 막대한 국가예산이 들어간 셈이다.

파이로프로세싱은 ‘의도적으로’ 과대포장된 기술이다. 2011년 4월 원자력협정 협상 대표단이 워싱턴 특파원들에게 배포한 보도자료를 지금도 갖고 있다. 파이로프로세싱이 한국 원자력계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것처럼 과장한 보도자료다. 핵확산 우려가 없고, 핵폐기물의 독성을 1000분의 1로 낮출 수 있고, 폐기물 처분장 면적을 100분의 1로 줄일 수 있으며, 현재 보관 중인 사용후핵연료를 재활용해 원전 20기를 120년간 가동한다는 내용이다. 미국 정부가 파이로프로세싱의 확산저항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파이로프로세싱 재활용 연료는 상업성이 없으며, 그 연료를 사용하려면 고속로 개발이라는 난제를 먼저 풀어야 한다는 점, 고속로 개발은 언제쯤 가능한지 알 수 없고 천문학적 규모의 국민세금이 들어간다는 점 등의 ‘진실’은 보도자료에 없다. 당시 협상 대표단에 “10년 뒤에도 같은 보도자료를 낼 자신이 있는가”라고 물었지만 그들은 답하지 않았다.

왜곡된 국내 선전으로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과정에서 극심한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파이로프로세싱 권리를 얻지 못하면 사용후핵연료 저장공간 부족으로 원전 가동이 중단된다거나, 미국이 농축·재처리 등 ‘핵주권’을 인정하지 않아 핵무기를 만들 수 없고 자주국방도 못한다는 식의 괴담이 국민감정을 자극했다. ‘파이로 추진파’에 휘둘린 보수언론들은 “이번 협정 개정은 미국이 한국을 동맹국으로 인식하는지 가늠하는 시금석”이라는 주장을 폈다. 결국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은 한·미관계를 뿌리째 흔들다 시한을 2년이나 넘긴 뒤에야 타결됐다. 이 광풍의 진원지가 파이로프로세싱이었다.

파이로 추진파는 이제라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 파이로프로세싱은 핵폐기물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지금 시급한 것은 파이로프로세싱이 아니라 핵폐기물 처분장 확보라는 진실이다. 핵폐기물 관리 측면에서 연구할 수는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상용화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지금까지 7000억원 이상 들어간 연구 규모를 적정한 R&D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는 진실이다. 왜곡 선전으로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고 외교 문제까지 일으킨 것에 대한 사과는 덤이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simo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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