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칼럼] 나의 어설픈 페미니즘
김명인|인하대 국어교육과 교수·문학평론가
주인은 노예를 영원히 해방시킬 수 없다. 주인이 자발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킨다면 그것은 주인-노예의 위계 관계에서만 가능한 시혜이지 해방은 아니다. 노예의 요구에 의해 주인이 그를 해방시켰다면 그것은 노예의 주체적 능동성의 힘에 의한 것이므로 주인은 역시 해방자가 될 수 없다. 그러면 노예의 예속 상태에 공감하고 자의에 의해서건 혹은 노예의 요구에 의해서건 노예를 놓아주려는 의도를 가진 주인은 어떻게 해야 해방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자기가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만 가능하다. 즉 ‘너는 더 이상 나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더 이상 너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주인도 노예도 함께 주인-노예의 위계 구조로부터 해방되어 진정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나는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층에 속해 있는 60대의 남성 대학교수이다. 경제적 중상층에 속할 뿐만 아니라, 크든 작든 공적 담론장에서 일정한 지분과 상징자본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층이자 사회적 강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위를 누리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편에 서서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늘 민감하고 불편한 자의식을 동반하는 일이다. 젊은 날 민중해방을 목청껏 외쳤고 지금은 모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연대를 입에 달고 살고 있지만 나 자신이 이 기득권을 말끔히 포기하지 않는 한, 이 불편함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약자·소수자들 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에 대해 생각할 때 이 불편함은 더 날카롭게 다가온다. 이 가부장제 자본주의의 오랜 지배 아래 살아가는 여성들의 고통과 불안에 대해 늘 많은 생각을 하고, 공감과 연대를 표현하고 싶지만, 선뜻 그 생각들을 말로 옮기거나 글로 써내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대학교수라는 지위와 그 경제적 혜택은 후천적으로 획득된 것이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언제든 변동될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므로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는 어려운 일도 아니고 위선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남성이라는 우월한 젠더 지위는 생물학적이고 개체발생적으로 선천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역사적이고 계통발생적으로 매우 유구한 전통을 가진 것으로 한 남성 개인에 의해 전부 반성되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설사 어떤 개인 남성이 젠더적 자각과 감수성이 상대적으로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가 더 이상 억압자나 위선자가 아니라는 보증이 될 수는 없다. 주인이 주인의 지위를 내려놓으면 주인과 노예 모두 해방될 수 있지만, 주인의 지위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면 그 해방에는 여전히 의문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 년 전 미투운동이 한창일 때, 나는 많은 여성들이 침묵과 굴욕으로부터 과감하게 떨쳐 일어서는 모습에 감동했으며 그에 대한 전적인 지지의 뜻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곤 했었다. 그 때문에 적지 않은 여성들로부터 성원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모호함과 불철저함에 대해서는 혹독한 질타 역시 적지 않았다. 한편 일부 남성들은 내게 이미 온갖 젠더적 불평등을 향유해온 기득권 남성인 주제에 섣부른 일반화로 남성 전체를 매도하지 말라는 취지의 공격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나 같은 기득권층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고, 또 주제넘은 일이 되기 쉽다. 그저 모처럼 어렵게 살아난 여성해방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퍼져나가 이 부당한 기성질서를 해체하는 모습을 보게 되기를 기대하며 나와 내 주변 일상세계에 여전히 작동하는 가부장 질서에 대한 깨어 있는 감시자의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작은 기여를 하리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가 순조롭게 오리라는 기대는 순진한 것이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미투운동 이후 여성들의 각성과 행동이 고조되는 만큼, 그에 대한 기성체제의 반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이른바 백래시가 시작된 것이다. 일부 ‘파렴치한’ 젠더폭력 가해자들로부터 대다수 ‘선량한’ 남성시민들을 격리 보호하고, 이른바 ‘양성평등론은 지지하지만 그것이 남성에 대한 적대시나 혐오로 급진화하는 것은 문제다’라는 전형적인 물타기, 혹은 분할지배의 논리가 마치 계엄령처럼 전 사회에 선포되고 작동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성들의 거침없는 사상과 행동에 놀란 ‘선량한 남성들의 집단지성’은 여성의 평등과 해방을 향한 오랜 고투를 담고 있는 ‘페미니즘’이라는 상식적인 용어를 ‘빨갱이’에 필적하는 급진적이고 반사회적인 용어로 변환시켜, 이제 사람들이 여성 현실에 대해 말할 때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서두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억압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나는 얼마 전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여성 양궁선수가 머리를 짧게 잘랐다는 이유로 페미니스트 여부를 검증받고, 심지어 금메달 박탈의 압력까지 받는 것을 보고 내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부장 사회의 이등시민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겠다는 여성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 이처럼 강력한 파시스트적 백래시가 되돌려지는 동안, 어두운 온라인 공간에서는 성착취영상물이 여전히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고, 공공기관과 군대, 크고 작은 기업에서의 성폭력과 피해자들의 극단적 선택은 끊이지 않고,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은 줄어들지 않고, 미투 가해자들은 어느새 억울한 모략과 명예훼손의 피해자로 변신하고 있다. 여성들은 여전히 결혼과 출산을 망설여야 하고, 차별적 임금체계와 유리천장이 개선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페미니즘은 남성들을 적대시하는 사유와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을 지배-피지배 관계 속에 욱여넣어 인간의 인간에 대한 노예화를 유지해야만 지속 가능한 사회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인간해방 운동이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현재의 가부장제 사회가 남성인간에 의한 여성인간의 경제적 성적 착취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인류의 절반인 여성들 절대다수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반쪽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 역시 생애 전체를 통해서 그 착취 구조에 깊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을 알면서 페미니즘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지금 바로 여기서부터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나의 페미니즘을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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