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 라오스에서는 [K-VINA 칼럼]

입력 2021. 9. 23. 15:57 수정 2021. 9. 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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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도 구월이 왔다

가을바람이 문턱을 타고 살며시

베갯잇을 적시는 귀뚜라미 울음 대신

서쪽하늘에 짙은 먹구름 따라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

삼월에 피었던 꽃은 또다시 피어나고

파란 나뭇잎은 언제나 그대로

들판은 변함없이 초록물결이다

라오스에 구월은 왔는데도

거칠게 쏟아지는 저 장맛비

그리고 그 빗물위에

다시 강렬하게 내려쬐는 저 한낮

바람에 뒹구는 나뭇잎도

사시사철 푸르고 푸르른 동남아 어귀

뜨거워서 숨쉬기조차 힘들어

바깥활동이 넉넉지 않아

단조로울 수밖에 없는 열대나라의 일상

어쩌다 빗속을 거니노라면

야생 사우나에 온몸이 흠뻑 젖는다

비가 하늘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땅에서도, 바람 속에서도 쏟아져

우산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콩 타작 하듯 떨어지는 빗소리

주먹만한 빗방울에 손등도 아프다

한바탕 난리굿을 치르듯

전화벨 소리조차 듣기 힘든 날

함께 운동 하던 K가 갑자기 짐을 싼다

라오스에 온지 몇 달 되지 않았지만

회사 일에 얼마나 열정적인지

밥값이나 하고 있는지 걱정이라며

새 사업 발굴에 온 정성이라

볼 때 마다 걱정에 찬 목소리였지만

오늘 저 발걸음은 분명 희희낙락이다

웬일일까 묻기도 전에

비오는 날은 김치전이 최고라며

한잔하자고 전화를 받았다며

땀에 젖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먼저 간다는 말을 빗물에 던져놓고

득의양양 사라졌다

특히 특급 요리사 P가 합류하면서

동네가 “술파트라”로 불릴 정도다

김치도 담그고 요리를 즐기는 신세대

주말이면 딸아이가 아빠요리만 찾는다며

딸 바보 아빠라고 스스로 지칭할 정도로

가족 사랑이 유별나다

라오스 현지 대표업무의 바쁜 와중에도

오늘 김치전을 부치겠다고 나선 것도

마음 넓적한 P다

얼마 전 담은 김치가 삼삼하게 익었다며

비오는 날엔 김치전이라며

잔치국수와 막걸리는 덤이라며

저 빗속에 훈김나는 문자를 때린 것이다

누군가 집으로 부른다는 것은

내 속살을 다 보여주는 것인데

예전에 우리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 라오스에서는 그 두꺼운 껍데기가

허물 벗듯 벗겨지고 있는 중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운동을 하며

술을 마시기 위해 일을 하며

내일 술을 마시기 위해 오늘 자야한다는

애주가 K의 궐기는

그의 순수한 만큼이나 마음도 끈끈하다

웬만하며 형 동생이 되고 정성을 다한다

그의 궐기에 나가떨어진 사람이 많다

몇 주째 복통으로 쩔쩔매는 S가 대표적이다

아마 5일 정도 생명은 단축되었을 것 같다며

기분파 S는 해외 근무가 처음이라면서도

낯설어 하기는커녕 사람이 좋아

사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타난다

속이 안좋아 며칠째 청국장만 먹으면서도

술자리만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나타나 잔의 시동을 거는 불멸의 사나이다

주재원 중 누군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들리면

보내기가 아쉬워, 또 언제 다시 볼지 몰라

한 달 내내 환송연이 열리고

누군가 라오스에 오게 되면

고국의 향취를 맡고 싶다며

하루가 멀다하고 불러내기 일쑤다

얼마 전 지인이 들어오자

14일간 격리를 어떻게 견디냐며

열대과일이며 맥주 박스와 안주다발을

통째로 배달하고 메콩강변에서 안부를 묻는

사람 냄새가 진동하는 이곳 라오스 싱글촌

추석만큼이나 좋은 구월이지만

가족과 멀리 떨어져 외롭고

더위에 지친 단조로운 삶들이

일부러 음식을 만들고

일부러 사람을 불러서

인생이 뭐있냐고 잔을 건넨다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일까?

라오스의 밤은 아직도 30도가 넘는다

그 좋은 구월이 왔는데도

북쪽하늘엔 천둥번개가 사납다

코로나로 사방이 막혔다

칼럼 : 황의천 라오스증권거래소 C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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