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갈등 봉합했지만 깊은 내상 입은 프랑스
10월 G20 양자회담, 주미 프랑스대사 복귀
'프랑스 전략적 독자성에 미국 징벌' 해석도
앵글로색슨국 결집 강화에 프랑스 고립 심화
프랑스와 미국의 외교 분쟁이 정상 간 통화로 봉합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별안간 고립과 위상 추락을 경험한 프랑스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깊은 상처를 안겼고, 프랑스의 세계 전략에도 적잖은 타격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백악관과 엘리제궁은 조 바이든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이 22일 통화로 “신뢰 확보”를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공동 발표문을 통해 밝혔다. 두 정상은 10월 말 로마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양자회담을 하기로 했고, 프랑스는 5일 만에 주미 대사를 복귀시키기로 했다.
이번 갈등은 중국 견제를 추구하는 미국과 영국이 오스트레일리아에 핵잠수함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전격 발표하며 시작됐다. 프랑스 국영 군수업체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디젤 잠수함 12척을 660억달러(약 78조원)에 팔기로 한 계약이 파기되자, 장이브 르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은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프랑스 2텔레비전> 인터뷰에서는 프랑스는 “이중적이고, 경멸적이며, 거짓말하는 동맹의 일부분일 수는 없다”고까지 했다. 이런 반발에 먼저 통화를 요청한 바이든 대통령은 잠수함 문제를 프랑스와 “더 상의했어야 했다”며 마크롱 대통령을 다독인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사실상 얻은 게 없다.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핵잠수함 기술 제공 계획을 철회하지 않았고, 단지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대테러 활동을 돕겠다는 말만 내놨다.
특히 프랑스로서는 경제적 손실과 함께 유럽과 세계 안보 체제에서 ‘2류’일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이 드러난 게 뼈아픈 대목이다. 프랑스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잠수함을 공급함으로써 군사 강국 위상을 확인하고 중국 견제에 있어서도 독자성을 과시할 것으로 기대했다. 프랑스는 폴리네시아에 자국령을 보유한 ‘태평양 국가’라면서, 미국을 마냥 따라가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왔다.
유럽 안보 문제에서도 미-영 밀착 강화로 입지가 좁아졌다. 유럽 안보의 유일한 축은 미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였고, 프랑스도 핵심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국 견제가 주목적이라고는 해도 미국-영국-오스트레일리아라는 앵글로색슨 안보동맹이 나토의 위상을 잠식할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프랑스로서는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한 영국의 이간질에 당했다고 여길 법하다. 갈등이 진행 중인 가운데 미국에서는 유엔총회를 계기로 미-영, 미-오스트레일리아 정상회담이 잇따라 열려 이 3개국 안보동맹 ‘오커스’(AUKUS)의 화려한 데뷔를 알렸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프랑스의 반발에 대해 “친구들 중 일부는 자중해야 한다”며 놀림조로 말했다.
외교가에서는 왜 미국까지 프랑스의 뒤통수를 치는 데 가담했는지도 화젯거리다. 이에 대한 설명들 중 한 가지는 종종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며 독자 노선을 강조한 프랑스에 대한 징벌이라는 것이다. 프랑스는 1956년 수에즈운하를 이집트에 돌려주는 문제로 미국과 갈등했고, 1966년엔 미국과의 주도권 다툼 와중에 나토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2003년엔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했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직전인 지난해 12월 유럽연합과 중국의 투자협정 합의를 프랑스가 주도한 것을 미국이 괘씸하게 봤다는 해석도 나온다.
프랑스의 배신감과 고립감은 쉽게 극복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내년에 재선을 노리는 마크롱 대통령 개인에게도 타격이다. 미-프 정상은 6월에 영국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어깨를 겯고 다정한 장면을 연출했다. 하지만 이때 ‘오커스’ 정상들은 핵잠수함 문제를 은밀히 논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프랑스는 지난 16일 불과 몇시간 전에야 3개국 발표 내용을 전달받았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자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에서 미국을 돕고도 “개 취급을 받는다”고 한탄했다.
프랑스로서는 수모를 감내할지 아니면 ‘전략적 독자성’을 배가할지 선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유럽 독자 노선’을 함께 말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마저 퇴장을 앞둔 상황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운신 폭은 넓지 않아 보인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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