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비만치료제 게임체인저 나왔나
요즘 코로나19와 관련해 ‘게임체인저’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게임체인저'는 어떤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나 사물을 뜻하는 영어로 마땅한 번역어가 없어 그냥 쓰는 것 같다.
지난해 여름 렘데시비르라는 항바이러스 약물이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게임체인저가 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임상 결과 그 정도는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심지어 효과가 없다는 결과도 있다).
지난 연말 백신이 개발되면서 먼저 접종에 들어간 이스라엘과 영국에서 확진자 수와 사망자 수가 급감하면서 특히 mRNA(메신저리보핵산) 백신이 게임체인저라고 칭송을 받았지만 올봄 델타변이바이러스가 등장하면서 한계가 드러났다. 최근 효과가 큰 먹는 치료제가 개발돼 긴급승인이 머지않았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역시 게임체인저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1인당 치료비가 90만 원이나 하는데도 우리 정부까지 선구매 예산을 배정했을 정도다.
지난주 신문을 보다 비만치료제에서도 게임체인저로 기대를 모으는 약물이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마글루타이드라는 약물(제품명 위고비)로, 일주일에 한 번 주사하는 것만으로 68주 뒤 몸무게가 평균 15%나 줄었다는 것이다. 기존 비만치료제들이 매일 먹거나 주사를 맞아도 10% 미만인 걸 생각하면 게임체인저라고 할 만하다.
어떤 약인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원래는 당뇨병치료제로 개발됐고 용량을 늘려 임상시험을 한 결과 체중감량 효과가 인정돼 지난 6월 미식품의약국(FDA)이 비만치료제로 승인했다고 한다.게임체인저로 기대를 모으고 있는 세마글루타이드 승인을 계기로 비만치료제의 현황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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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본격적인 비만치료제 시대 열려
비만치료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먼저 행동요법으로 다이어트와 운동을 병행하는 방법이다. 살도 빼고 건강도 좋아지는 일석이조의 방법이지만 꾸준히 실천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 다음은 수술 요법으로 위의 일부를 잘라내 적게 먹어도 포만감이 느껴지게 해 살을 빼는 방법이다. 효과는 크지만 워낙 부담이 커 방치하면 건강이 위험한 고도비만 환자들이 대상이다.
세 번째는 약으로 살을 빼는 비만치료제다. 살을 빼고 싶지만 행동요법을 꾸준히 실천할 엄두가 안 나거나 수술을 감행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방법이다. 사실 비만치료제의 역사는 수천 년에 이르지만, 현대 서구의학에서 본격적으로 적용한 역사는 20여 년에 불과하다. 지난 1월 학술지 ‘세계남성건강학회지’에는 비만치료제의 역사를 다룬 부산대 의대 탁영진 교수와 이상엽 교수의 리뷰가 실렸다. 이를 바탕으로 대표적인 비만치료제 5종을 소개한다(이 가운데 하나는 부작용 우려로 지난해 시장에서 철수했다).
먼저 1999년 장기간 쓸 수 있는 비만치료제로 처음 FDA 승인을 받아 게임체인저로 기대를 모았던 오르리스타트(제품명 제니칼)로 한국에서도 이듬해 승인이 나 지금까지 처방되고 있는 약물이다. 오르리스타트는 지방분해효소의 작용을 억제해 장에서 지방의 흡수율을 30%가량 줄이는 약물이다. 따라서 지방 섭취가 많아 비만인 사람들에게 효과가 크다. 그러나 흡수되지 않은 기름이 변에 섞여 불쾌한 상황이 생길 수 있고 지용성 비타민이 결핍될 가능성도 크다. 체중감량 효과도 1년 복용 뒤 평균 2.9%에 불과해 다소 실망스럽다.
다음은 2012년 FDA 승인을 받은 로카세린(제품명 벨빅)으로 3년 뒤 한국에서도 승인을 받았다. 로카세린은 뇌의 식욕중추인 시상하부 궁상핵에 분포한 세로토닌 수용체에 달라붙어 포만감을 느끼게 해 덜 먹게 한다. 로카세린의 체중감량 효과는 1년 복용 뒤 평균 3.1%로 그리 크지 않다. 그런데 심장 관련 부작용을 알아보는 임상을 진행하다 뜻밖에도 암 발생률이 위약을 복용한 대조군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지난해 시장에서 철수했다. 한국에서도 그동안 5만여 명이 이 약을 복용했거나 복용하고 있었다.
역시 2012년 FDA의 승인을 받은 '펜터민/토피라메이트'(제품명 큐시미아)는 최초의 복합제제 장기간 복용 비만치료제다(2019년 국내 승인). 펜터민은 교감신경을 자극해 대사율을 높이는 약물이고 토피라메이트는 원래 뇌전증(간질)이나 편두통 치료제로 개발됐지만 임상 과정에서 체중 감소 효과가 발견됐다. 불면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아침에 복용한다. 한편 펜터민은 의존성이 생길 수 있고 토피라메이트는 인지기능을 손상시킬 위험성이 있어 유럽에서는 승인을 받지 못했다. 펜터민/토피라메이트의 체중감량 효과는 1년 복용 뒤 평균 6.8%로 위의 두 약물보다 크다.
2014년 FDA 승인을 받은 두 번째 복합제제 '날트렉손/부프로피온(제품명 콘트라브)은 특이한 조합이다(2016년 국내 승인). 날트렉손은 약물중독이나 알코올의존증 치료제이고 부프로피온은 항우울제로 금연을 돕는 약물인데 둘을 적절히 조합하자 식욕을 억제해 체중을 줄이는 효과가 유의미하게 나타난 것이다. 식탐도 일종의 중독이기 때문이다. 날트렉손/부프로피온의 체중감량 효과는 1년 복용 뒤 평균 4%로 그리 크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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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시장을 장악했지만...
지금까지 소개한 네 약물에서 지방 흡수를 막는 오르리스타트를 뺀 나머지 세 종은 뇌의 식욕 중추에 영향을 미쳐 작용한다. 그런데 2014년 완전히 새로운 경로로 체중을 줄이는 약물이 FDA 승인을 받아(국내는 2017년) 몇 년 만에 세계 비만치료제 시장을 평정했다(2019년 점유율 56%). 덴마크의 제약회사 노보노디스트의 리라글루타이드(제품명 삭센다)다.
원래 리라글루타이드는 당뇨병치료제로 개발돼 2010년 FDA 승인을 받은 약물이다(제품명 빅토자. 같은 약물임에도 용도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다). 그런데 체중 감소 효과도 나타나 용량을 1.7배로 늘린 추가 임상을 거쳐 비만치료제로 승인이 난 것이다. 리라글루타이드의 체중감량 효과는 1년 복용 뒤 평균 5.4%로 펜터민/토피라메이트보다는 작지만 대신 부작용이 덜하다. 리라글루타이드는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호르몬과 구조가 비슷해 GLP-1 수용체에 달라붙어 신호를 보낸다.
GLP-1은 비교적 늦게 실체가 드러난 호르몬이다. 같은 양이라도 포도당 주사를 맞을 때보다 포도당을 먹을 때 혈당조절이 잘 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과학자들은 이 현상을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했고 마침내 음식을 먹을 때 장에서 분비되는 GLP-1을 찾았다.
GLP-1은 췌장 베타세포의 인슐린 분비를 늘리고 췌장 알파세포 글루카곤 분비를 줄여 혈당을 조절한다. 인슐린은 포도당을 글리코겐으로 합성하게 유도하는 호르몬이고 글루카곤은 글리코겐을 포도당으로 분해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호르몬이다(서로 반대 역할). 혈당을 낮추는 걸 부추기고 높이는 걸 억제하니 일석이조다.
다만 인슐린과는 달리 GLP-1 자체를 외부에서 투입할 수는 없다는 게 문제다. 혈액에는 GLP-1을 분해하는 효소인 DPP-4가 있어 GLP-1의 반감기(농도가 절반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가 1~2분에 불과하다. 따라서 여러 제약회사들이 차세대 당뇨병치료제로 GLP-1처럼 작용하면서도 DPP-4에 버티는 약물이나 DPP-4의 작용을 억제해 체내 GLP-1이 오래 가게 하는 약물을 개발하는 연구에 뛰어들었다.
노보노르디스크가 개발한 리라글루타이드는 전자의 유형으로, GLP-1에서 34번째 아미노산을 바꾸고 26번째 아미노산에 탄소원자 16개 길이의 지방산 사슬을 붙인 분자다. 그 결과 DPP-4가 분해에 애를 먹어 피하주사할 때 반감기가 13시간에 이르렀다. 하루에 한 번만 주사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메트포르민 같은 기존의 먹는 약물이 있어 당뇨병치료제로 빛을 보지는 못했다.
리라글루타이드는 혈당을 조절할 뿐 아니라 위에서 소장으로 음식이 내려가는 걸 늦추는 효과도 있고 식욕 중추에 작용해 포만감을 더 쉽게 느끼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이 약물을 복용한 당뇨병 환자들의 체중 감소 효과가 보고되자 회사는 용량을 늘려 본격적인 임상에 들어갔고 2014년 승인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7년이 지난 현재 세계 비만치료제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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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감기 13시간에서 165시간으로
그럼에도 아쉬운 점은 있다. 매일 주사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먹는 형태로 만들거나 주사 맞는 간격을 늘릴 수 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찾을 것이고 어쩌면 게임체인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목표로 리라글루타이드 분자를 개선해 나온 게 바로 세마글루타이드이다.
세마글루타이드는 리라글루타이드 분자에서 아미노산 하나를 바꾸고 중간에 탄소원자 16개 길이의 지방산 사슬 대신 감마Glu-2xOEG라는 부분이 포함된 탄소원자 18개 길이의 지방산 사슬을 붙인 분자다. 그 결과 DPP-4가 분해하기 더 어려워져 피하주사 투여시 반감기가 165시간으로 크게 늘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주사하면 된다는 말이다. 세마글루타이드는 2017년 당뇨병치료제로 FDA 승인을 받았고(제품명 오젬픽) 2년 뒤에는 먹는 약으로도 승인을 받았다(제품명 라이벨서스). 다만 라이벨서스는 약효가 떨어져 매일 먹어야 한다.
세마글투타이드 역시 비만치료제로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임상에 들어갔고 지난 3월 학술지 ‘뉴잉글랜드의학저널’에 결과를 담은 논문이 실렸다. 결과는 놀라웠다. 주 1회 피하주사를 맞고 체중 관리 조언을 들은 그룹은 68주 뒤 몸무게가 평균 14.8%나 줄었다. 체중 관리 조언만 들은 대조군은 평균 2.4% 줄어드는 데 그쳤다.
물론 부작용이 없지는 않다. 주로 소화계 부작용으로 메스꺼움과 설사가 가장 흔했다. 그 결과 임상 참가자의 4.5%가 중간에 그만뒀다(대조군은 0.8%). 다만 대부분 일시적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증상이 잦아들었다. 전체적으로는 부작용이 현재 비만치료제 1위인 전작(前作) 리라글루타이드보다 덜하다. 청출어람청어람(靑出於藍靑於藍)인 셈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세마글루타이드 당뇨병치료제(오젬픽과 라이벨서스 둘 다)는 아직 국내 승인을 받지 못했다. 따라서 비만치료제(위고비)가 허가가 나려면 꽤 기다려야 할 것 같다. 게임체인저로 기대되는 신약이 국내 비만환자들에게는 한동안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나까지 아쉽게 느껴진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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