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죽지못한 아비는 애끊는 고통을 새겼다

박경일 기자 2021. 9. 23.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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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철원의 소이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황금빛으로 물든 철원평야의 모습. 황금 들녘 너머가 북한 땅인 평강고원이다. 이곳에 서면 백마고지 전적지와 백마고지, 김일성 고지, 아이스크림 고지 등 6·25 전쟁 당시 치열했던 격전지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왼쪽 사진은 경북 청도의 육군대위 예태원도사비. 예 대위의 아버지가 비석 뒷면의 자기 이름 앞에다 ‘죽지 못한 아비(未死父)’라 썼다. 오른쪽은 전북 장수의 정자 구암정과 비각. 왼쪽 건물이 6·25 전쟁 때 전사한 박춘봉의 추모비가 있는 비각이고, 오른쪽 숲 속 건물이 정자 구암정이다.
법연 스님이 자신의 기구한 삶을 꼼꼼히 적어놓은 글.
경북 포항 용화사 경내에 있는 두 기의 비석. 하나는 6·25 전쟁 때 전사한 군인 남편의 비석이고, 다른 하나는 남편이 죽은 자리에 절집을 짓고 평생을 머물다 입적한 아내 법연 스님의 비석이다. 용화사를 지키고 있는 정수 스님이 비문을 설명하고 있다.
군 복무 중 사고로 죽은 아들을 기리는 다리를 놓고 아버지가 세운 비석.

■ 6·25전쟁에 가족 잃고… 눈물로 세운 비석

스물셋 아들, 휴전앞두고 전사

‘未死父’… 원통한 심경 글귀로

고향땅에 ‘참혹한 슬픔’의 증거

같은 전투서 죽은 또 다른 청년

父, 자신의 공적비 옆에 충혼비

“아들 제사 부탁” 친척에 유언도

남편 전사한 포항에 위령비 건립

출가해 절 짓고 평생 머문 비구니

입적 뒤에야 남편 곁에 나란히 서

저마다 사연·억울함 다르지만

‘격전지’ 철원 곳곳에 청춘들 주검

성연교 표석도 또다른 비극 상징

청도·장수·포항·철원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 비석, 가장 참혹한 슬픔을 증거하다

자식의 죽음은 창자가 끊어진다는 ‘단장(斷腸)’의 비애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절망이자 가장 고통스러운 슬픔이다. 참척(慘慽)의 슬픔을 가눌 길 없었던 한 아버지가 죽은 아들의 비석을 고향 땅 길가에 세웠다. 두 해 전쯤, 길에서 우연히 그 비석을 만났다. 아버지가 세운 비석을 찾아 나서게 된 느슨한 여정의 시작은 이랬다.

경북 청도군 매전면 지전리. 지금은 캠핑장으로 쓰이고 있는 청도군농촌체험관광센터 담장 밖 58번 국도가 지나는 길가 풀숲에 비석은 서 있다. 육군 대위 예태원 도사비(悼思碑). ‘설워할 도(悼)’에 ‘생각할 사(思)’ 자를 썼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육군 대위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아버지가 아들이 나고 자란 마을에 세운 비석이다. 비석 뒷면에다 아버지가 한자로 새겨놓은 글을 읽는다. 이한우 논어등반학교 교장이 비문을 풀어주었다.

“너는 날 때부터 바탕이 아름다웠다. 일찍이 학문에 나아가는 바람에 나는 늘 아득히 그리워했지. 산은 막히고 물은 메말라 운수가 이미 고르지 못했는지 마침내 전몰(戰歿)을 당하고 말았구나. 돌을 떼어 글을 새겨넣으니 이는 실로 원통함과 억울함에서 나온 것이어서 닳아 없어지지 않으리라. 여기 이것이 그 아이의 살아서의 흔적이다.”

비석의 문장보다 더 가슴 뭉클했던 건 비석 한 귀퉁이에 작게 새긴 아버지 이름이었다. “단기 4287년(1954년) 아직 죽지 못한 아비(未死父) 윤기(潤基) 세우다(竪).” 아버지의 이름 윤기(潤基) 앞에다 써넣은 ‘아직 죽지 못한 아비’라는 글귀에서 아버지의 가슴을 치는 애통함이 만져지는 듯했다. 그 비석이 오래 마음에 남았던 이유다.

비석은 전장에서 죽은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지만 아버지마저 세상을 뜬 지금, 비석은 아버지가 겪었을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증거 하며 서 있다. 비석을 아들의 죽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절절한 슬픔으로 읽게 되는 이유다. 그 앞에 오래 서서 비문의 주문 같은 대목을 다시 읽어본다. ‘원통함과 억울함에서 나온 것이어서 닳아 없어지지 않으리라.’

# 스물세 살 청년의 죽음과 아버지

예태원. 6·25 전쟁 당시 육군 5사단 36연대 대위. 군번 119013. 휴전을 두 달쯤 앞두고 있던 1953년 5월 28일. 그는 지금 강원 철원군 김화읍 땅인 김화군에서 벌어진 김화 전투에서 전사했다. 휴전을 코앞에 두고서 남북이 서로 한 뼘이라도 더 땅을 차지하고자 철원 일대에서 치열한 고지전이 밤낮없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세 살이었다.

전사통지서가 고향 집에 전해지자 아버지는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슬픔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아들을 위해 고향 땅에 비석을 세웠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는 지금쯤 저승에서 먼저 간 아들을 만나고 있을까. 피붙이를 남기지 않은 예 대위의 비석은 여태 고향 땅을 지키고 있는 조카 예의해(82) 씨가 관리하고 있었다. 주민을 수소문해 어렵게 이웃 마을에서 예 씨를 찾았다. 논에 나가 물을 보고 있던 조카 예 씨는 삼촌을 기억해주는 외지인이 반가웠던지 목이 멘 채 “찾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죽은 삼촌은 4남매 중 셋째예요. 소작하는 없는 살림에도 서울로 대학까지 보냈을 만큼 할아버지가 아끼던 자식이었어요. 온 집안의 기둥이었던 삼촌의 황망한 전사 소식에 할아버지가 얼마나 비통해하시던지…. 오죽 답답했으면 원통함을 달래려 저렇게 비석까지 따로 세웠겠어요.”

예 대위는 서울에서 한양대를 다니면서 학도호국단 간부를 맡았던 인연으로 6·25 전쟁이 나자 바로 장교로 임관해 전쟁터로 나갔다. 조카 예 씨는 전사한 삼촌을 ‘훤칠한 키에 당당한 체구의 군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조카 예 씨는 “아들을 전쟁으로 잃은 뒤에 할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집안에 운이 없어서 이런 사달이 났다”고 말했단다. 아들이 꽃다운 나이에 죽은 이유를 이해도, 용납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래서 아버지는 죽음의 책임을 ‘거역할 수 없는 운’으로 돌렸던 건 아니었을까.

# 아비의 공적비 옆에 아들의 비석

예태원 대위 도사비와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단장의 슬픔으로 세운 또 다른 비석이 전북 장수군 계북면 원촌리에 있다. 그 비석이 기리는 죽음의 주인공도 예 대위와 마찬가지로 강원 철원의 김화 전투에서 전사했다. 같은 전장에서 함께 죽은 이들의 자취가 도처에 있다. 저마다 다 아버지가 있었고, 고향이 있는 젊은이들이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계북면 원촌리 원촌삼거리에서 635번 지방도로에 올라 양악천 물길을 따라 200m쯤 더 가면 물가에 정자 구암정(龜巖亭)이 있다. 정자가 딛고 선 자리는 장수 땅인데 정자는 물 건너편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 보안촌의 순천 박씨들이 1964년에 지은 것이다. 함석지붕의 소박한 정자지만, 이곳의 경관을 시와 문장으로 적은 현판만 열세 개를 걸어두었을 정도니 풍류가 보통은 넘는다.

여기까지 와서 찾은 건 정자가 아니라 정자 옆 개울가의 비각이다. 녹슨 함석지붕의 비각 안에는 두 기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사인(士人) 순천 박노준 기념비’이고, 다른 하나는 6·25 전쟁 때 김화 전투에서 전사한 박춘봉의 ‘충혼비(忠魂碑)’다. 비석이 기념하는 박노준은 순천 박씨 일가에서 존경받던 인물이었던 모양이었다. 구암정도 그가 사재를 털어 지은 정자다. 비석에는 그의 바른 행실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옆의 충혼비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박노준의 아들 박춘봉을 기리는 비석이다. 병장 박춘봉은 강원 철원의 김화 전투에 참전했다가 1952년 1월 19일 전사했다. 예 대위가 전사하기 1년 4개월 전의 일이다.

박노준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와 비각은 1964년 7월에 세워졌다. 그런데 자식을 잃은 참척의 슬픔을 가진 아버지가 어찌 제 공적을 자랑할 수 있었을까. 죽은 지 10년도 더 된 아들의 충혼비를 비각 안에 함께 세우자고 했던 건 아마 아버지 박노준의 뜻이었으리라.

박춘봉 일가의 후손은 대부분 고향을 떠났고, 오촌당숙 박형국(69) 씨만 거기 살며 비각을 관리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해마다 10월 초사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자식을 아홉이나 낳았는데 다 죽고 마지막 남은 아들이 박춘봉이었어요. 딱 하나 남은 아들마저 전사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무너지셨겠어요.” 박노준은 말년에 친척을 불러모아 500평 땅문서를 꺼내놓고는 “내가 죽은 뒤에도 아들 박춘봉을 위한 제사를 지내달라”고 부탁했단다. 죽어서까지 애달팠던 가슴에 묻은 아들의 제사는, 그렇게 지금까지 오촌당숙으로 이어지고 있다.

# 남편 죽은 자리에서 평생을 기도하다

이번에는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화대리 비학산 자락 아래 사찰 용화사 경내에 있는 남편과 아내의 두 기 비석 얘기다. 비석 하나는 1950년 8월 23일, 경북 포항의 비학산 고지탈환 전투에서 전사한 남편 권태응 대위의 것. 그 옆의 다른 하나는 남편이 죽은 자리에 병사와 학도병의 명복을 축원하는 사찰을 짓고 머물다가 2017년 1월 입적한 권 대위의 아내 법연 스님(속명 한연화)의 것이다.

권 대위는 육군사관학교 9기생으로 졸업도 하기 전에 6·25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 북한군 남진 방어를 위한 기계-안강 전투에 투입됐다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결혼한 지 5년 된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서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아내는 남편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의 순간을 잊지 못했다. 어찌나 한이 되었던지 출가 후 법연 스님은 그때의 사정을 글로 적어놓았다. 법연 스님에 이어 용화사를 지키고 있는 주지 정수 스님이 법연 스님이 생전에 친필로 편지지에다 쓴 글을 꺼내 보여줬다.

사관학교 재학 중 권 대위는 아내와 딱 두 번 만났다. 그중 한 번은 경북 상주의 시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갔다. 그날의 기록이다. 뜬눈으로 밤을 밝힌 아내는 이튿날 마을 밖까지 남편을 배웅했다. 그날 버스를 기다리며 남편과 나눈 대화를 법연 스님은 이렇게 적었다. “…내 몫까지 효도를 좀 해주시오. 그리고 애들도 훌륭하게 길러주시오 하시며 (남편이) 당부를 하시는데, 나에겐 꼭 유언처럼만 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 바보처럼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저 애써 울음만 꾹꾹 누르고 있었으니 지금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다.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내드리고 말았으니….”

# 죽어서 나란히 비석으로 선 부부

비극은 남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큰아들이 월남파병에 차출됐다. 남편을 전쟁에 잃고 자식을 또 전장으로 보내야 하는 어미의 심정은 어땠을까. 1968년 큰아들이 예정보다 일찍 월남에서 돌아왔다. 엄청난 포격으로 중대병력이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시신 수습 도중 시체 더미 속에서 실신해 있는 아들을 발견해 병원으로 후송했다가 귀국조치를 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큰아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렸으나 사지에서 돌아온 큰아들은 극심한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다. 돈 되는 것이라면 죄다 팔아 치료비로 썼지만 차도는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산에 올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법연 스님이 92세로 입적할 때까지 이어진 긴 기도의 시작이었다.

기도처를 찾아다니다가 남편이 전사한 포항의 비학산 자락에 거처를 정한 것이 1973년. 아내는 1985년 남편 권 대위가 죽은 자리에 뒤늦은 위령비를 세웠다. 산천이 다 타도 돌을 남겠지 싶어서 세운 비석이었다. 그리고 출가해 법연이란 법명을 얻고 그 자리에 용화사를 창건, 평생 그 자리를 지켰다. 죽음을 앞두고 병세가 위독해 신도들이 병원으로 옮기려고 했을 때, 법연 스님이 필담으로 비뚤배뚤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남긴 마지막 글씨가 있다. “용화사 외 ‘어대든지’ 가지 안 할 것.’ 출가는 속세와의 연을 끊는 것이라 했는데, 스님은 남편이 죽은 그 자리를 왜 그토록 떠나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법연 스님 입적 후 용화사는 군인 출신의 정수 스님이 지키고 있다. 우연히 절을 찾았다가 법연 스님과 맺은 기이한 인연으로 30년 복무 끝에 퇴역한 군인이 출가해 스님이 된 경우다. 정수 스님이 법복을 갖춰 입고 절집 마당에 나란히 세워진 권 대위 추모비와 법연 스님 공덕비로 안내했다. 잇단 비극 속에서 기도로 한평생을 산 아내가, 전사한 남편 비석 곁에 나란히 섰다. 죽어서 비로소 함께할 수 있었던 부부 얘기다.

# 죽음이 지나간 땅이 수확의 풍요로

이제 돌고 돌아 강원 철원 이야기다. 법연 스님이 6·25 전쟁 이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친정이 철원이었다. 앞서 다녀온 비석의 주인공인 예 대위가 전사한 곳도, 박 병장이 스러져간 곳도 철원이었다. 어디 그들뿐일까.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뜨거운 청춘이 그곳에서 차가운 주검이 되어 꺼졌다.

철원에도 아버지가 세운 비석이 있었다. 철원군 김화읍 청양3리. 청양초등학교 앞길에서 식당 수무정매운탕을 지나 길옆 비닐하우스 앞에 작은 돌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에는 ‘성연교’라 적혀 있다. 다리 이름을 적은 표석이라는데, 지형이 바뀌면서 다리는 사라졌고 길가에 표석만 남았다. 표석 앞 돌로 된 화병에 조화(造花)가 꽂혀있었다.

상병 황성연은 1967년 12월 12일 훈련 도중 비석이 있는 자리쯤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사고가 난 자리는 도로가 급하게 굽어 있어 평소에도 교통사고가 끊이질 않았던 곳이었다. 어찌나 길 사정이 열악했던지 마을 주민들은 수박을 가득 실은 차가 이 구간에서 속도를 내지 못해 수박 서리가 기승을 부렸다고 했다. 길이 굽어 화물차의 속도가 걸음보다 느리니 아이들이 차를 따라가며 짐칸의 수박을 슬쩍 하곤 했다는 얘기다.

군에 간 아들의 황망하고도 비통한 죽음에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아들의 죽음을 위로할 방법을 찾던 아버지는 사재를 털어 길을 곧게 펴는 공사를 벌였고, 그 공사로 놓인 다리 곁에다 사연을 비석으로 새겼다. “내 아들, 통일을 위한 맹훈련 중에 / 그 뜻을 못다 하고 이 굽은 길녘에서 순직하니 / 이를 바로 잡아 모든 이 쉬이 가고 / 그 넋을 위로하며 통일의 염원으로 / 아들 성연과 함께 이 다리를 나라에 바치노라.” 아버지는 비석에다 비석을 세운 날이 아니라, 아들이 숨진 날을 적었다. 1967년 12월 12일. 아들 상병 황성연은 대한민국의 포병이었다.

곧게 폈다고 했지만, 그래도 길은 살짝 굽었다. 비닐하우스에 나와 있던 마을 주민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저 길 위쪽의 논 주인 할아버지가 땅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텼어. 보상금을 준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드러누워 고집을 부렸지. 그때야 뭐 ‘땅이 하늘’이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길이 굽은 채로 공사가 끝났는데, 그리고 한 2년쯤 뒤였지 아마. 할아버지 아들이 자전거를 타고 그 길을 가다가 트럭에 치여 죽었어.” 또 다른 아들의 죽음. 땅을 내놓지 않고 고집을 부렸던 아버지의 회한은 또 얼마나 깊었을까.

비석을 다 돌아보고 철원평야와 그 너머의 평강고원까지 내려다보이는 소이산에 올랐다. 한때 땅이 녹아내릴 정도로 포탄이 쏟아졌던 가장 치열했던 전쟁의 격전지에 잘 익은 벼들이 가을볕에 노랗게 물결치고 있었다. 수확의 풍요로움으로 철원의 들은 평화로웠다. 이런 풍경 앞에서 전쟁으로 인한 젊은이들의 죽음과 그 죽음에다 걸어둔 묘비명을 생각했다. 죽음의 의의 혹은 죽은 이의 영웅적인 면모를 적은 건조한 문장의 수많은 비문보다, 더 가슴을 치는 건 자식 잃은 아버지가 돌에 새긴 슬픔이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국군의 날’이 코앞이었다.

■ 다시 세운 예태원 도사비

도사비는 예 대위가 전사한 이듬해에 세웠으니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에 만들어진 것. 그런데 말끔한 비석이 어쩐지 새것 같다. 조카 예의해 씨가 그 궁금증을 풀어줬다. 20년 전쯤 국도를 달리던 승용차가 비석을 들이받아 비석 밑동이 부러졌단다. 부서진 비석은 통째로 사라졌는데 나중에 풍각면의 돌 공장에서 찾았다고 했다. 사고 운전자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얼마쯤의 돈을 더해 예전 비석과 똑같이 글을 새겨 비석을 다시 세웠다고 했다. 부러진 예전 비석은 새 비석 옆에다 뉘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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