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심수봉과 함께 보낸 추석

김태일 장안대 총장 입력 2021. 9. 2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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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작년 추석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로 ‘테스형’ 돌풍을 일으켰던 KBS가 올 추석에는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을 올렸다. 이번에도 KBS는 ‘수신료의 가치’를 나름 한 것 같다. 나훈아가 우리의 가슴을 뒤흔든 회오리바람이었다면 심수봉은 우리의 가슴에 촉촉이 잦아드는 가을바람이었다. 심수봉도 국민가수였다. 방송 내내 우리 가족은 각자의 심수봉을 불러냈다. 할머니 품에서 자란 둘째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애창곡이었다는 기억을 꺼냈고, ‘백만 송이 장미’를 기다리던 아내는 그 노래가 끝머리를 장식하는 곡일 거라고 신통력을 보이며 우쭐했다. 1955년생 심수봉과 동갑인 나는 우리의 ‘세대’를 소환했다.

김태일 장안대 총장

심수봉은 같은 또래인 우리 세대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때 그 사람’ 때문이었다. 그는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마지막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돌이켜 보니 아쉬웠던 것은 역사 현장의 무게를 혼자 감당했을 그의 고통에 대해서 우리가 헤아릴 겨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관심은 그저 거대한 군부 권위주의가 신음을 내며 쓰러지는 구조의 변화였다. ‘그때 그 사람’이라는 노래의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이라는 가사를 “유신 하면 생각하는 그 사람”으로 바꾸어 부르며 우리는 서울역 광장을 향해 스크럼 행진을 하기에 바빴다. ‘그때 그 사람’의 스윙 리듬은 유신체제와 작별하는 우리의 즐거운 마음을 싣는 데 제격이었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그 ‘노가바’의 주인공인 심수봉은 어둠 속으로 내동댕이쳐진 모양이다. 우리는 나중에야 그것을 알았다.

짧았던 서울의 봄이 지나가고 군부 권위주의가 재집권하면서 심수봉이나 우리의 삶은 새로운 빙하기로 들어갔다. 모두가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때였지만 드문드문 들려오는 그의 소식은 어두웠다. 끝날 줄 모르는 억압과 고통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풍문이었다. 전두환이 이끌던 합동수사본부의 조사를 받고 나온 이후 방송 출연이 금지되었고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당하는 일을 겪기도 하여 제대로 된 가수 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겨우 방송 금지가 풀려 ‘무궁화’란 노래를 냈는데 그것이 국민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하루 만에 방송이 금지되는 고초도 경험했다. 이런 풍랑 속에서 그가 겪었던 마음의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까는 상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피어나라 대한민국, 심수봉’은 한국 현대사의 곡절과 파란을 오롯이 개인의 힘으로 맞아 왔던 한 인간의 존재를 새삼 깨우쳐주었다. 적어도 그와 같은 또래의 우리 세대에게는 그랬다. 이번에 우리가 놀란 것은 그의 숙성한 내면이다. 그는 아픔을 겪은 사람 같지 않았다. 그는 고통을 안으로 삭이면서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의 노래가 남달리 애절한 느낌을 주는 까닭이다. 절제된 슬픔, 삼켜진 아픔이 그가 전하는 감동의 특별함이었다. 방송에 잘 나오지 않으려 했다는 그의 말이 겸양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려움 속에서 조용히 내공을 쌓고 성장했다.

어려움 속에서 성장한 것은 심수봉만은 아니었다. 그 기간에 우리의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튼튼하게 자랐다. 그의 삶을 질곡으로 빠트렸던 군부 권위주의는 물러나고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여러 차례의 위기를 헤쳐나온 경제는 선진국 반열에 진입했다. 사회적 다양성과 개방성은 지구적 수준에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뭔가 부족하다. 단단하지 못한 것 같다. 세계적 냉전의 틀은 사라졌으나 한반도에서 갈등은 여전하고, 두 패로 나누어진 정치세력이 상대 진영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물질적으로 더 풍요해진 것은 사실이나 고르지 못한 삶의 상태는 사회를 더 불안하게 하고 있다. 사회적 다양성의 틈바구니에서 혐오, 배제가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성장을 했으나 다져지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실현하였으면서도 포퓰리즘이나 다수의 전제를 경계하고 있으며,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음에도 양극화의 위협을 걱정하고 있고, 사회가 발전했다고 하면서도 특권과 차별을 염려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다. 대통령 선거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떠들썩한 말의 성찬이 아니라 심수봉이 보여주었던 절제와 내공이다. 2021년 추석에 나타난 심수봉, 그는 느닷없이 한국 현대정치의 ‘광장’에 내던져진 비운을 안으로 삭이며 노래하였다. 그래서 그의 노래가 더 애타게 들렸던 것이 분명했다. 이번 추석, 심수봉의 감동이 보여준 절제의 아름다움을 되새겨 본다. 지금 우리 정치가 배워야 할 덕목이다.

김태일 장안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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