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가 중국계라 안된다”… 기술보호주의에 막힌 테크 M&A

실리콘밸리/김성민 특파원 2021. 9.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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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회의 서비스 세계 1위 ‘줌’ 17조원 규모
‘파이브나인’ 인수에 美법무부 “국가안보 차원서 위험”
올해 M&A시장은 2배 급증했는데 100억달러 이상 대형 계약은 실종
엔비디아·ARM, 매그나칩 매각 등 국가가 직접 계약 막는 경우 늘어

세계 1위 화상회의 서비스 기업 ‘줌(zoom)’이 미국의 클라우드 기반 콜센터 업체 ‘파이브나인’을 인수하려는 계획에 미국 법무부가 찬물을 끼얹었다. 17조원 규모인 해당 인수·합병을 미 국가 안보 차원에서 면밀히 들여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1일(현지 시각) “미 법무부가 줌의 인수 계획 검토를 마칠 때까지 해당 인수를 승인하지 말라고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에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줌은 미 캘리포니아 새너제이에 본사를 둔 미국 회사다. 하지만 창업자인 에릭 위안은 중국 태생이다. 그는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미 법무부는 위안이 중국계라는 이유로 사실상 줌을 중국 기업이나 마찬가지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법무부는 FCC에 보낸 서신에서 “법무부는 (이번 인수 건에) 외국인이 참여하는 것이 국가 안보 차원의 위험이 제기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100억달러 이상 테크 빅딜 사라져

줌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 중 폭풍 성장해 전 세계 화상회의 서비스 시장 점유율 40%를 차지한 1위 기업이다. 미국 정부는 최근 몇 년간 줌이 중국 법인에서 주요 기술을 개발하고, 중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부적절하게 일하고 있다며 감시해왔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은 “줌은 중국 기업”이라고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실리콘밸리의 한 엔지니어는 “에릭 위안 줌 창업자가 중국 태생이라 미국 내 사업에서 손해를 보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줌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줌이 기업이나 학교는 물론 정부 기관에서도 활용되면서 방대한 개인 정보를 축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개인 정보가 중국에 흘러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료=각 업계

IT 업계에서는 줌의 사례가 세계 각국에서 강화되고 있는 기술 보호주의의 영향 때문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자국 내 테크 기업이 다른 나라 기업에 넘어가면 첨단 기술과 데이터가 유출되고, 국가 안보에도 위협이 된다고 여기는 국가가 늘어나면서 테크 빅딜이 급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글로벌 M&A 시장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금융 정보업체 리피니티브에 따르면 올 1~8월 전 세계 M&A(인수·합병) 거래 규모는 3조9000억달러로 작년 같은 기간의 2배에 이른다. 하지만 국가를 넘나드는 대규모 M&A는 급감했다. 블룸버그는 “10억~100억달러 규모의 기업 간 인수·합병은 크게 늘었지만 빅딜은 사라졌다”고 했다. 기술 보호주의가 득세하면서 테크 산업에서 대규모 빅딜이 이뤄지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기술 보호주의 장벽 갈수록 높아져

세계 각국은 첨단 기술에 대한 보호주의 장벽도 높이고 있다. 영국과 유럽연합(EU)은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기업 ARM 인수에 제동을 걸고 있다. 영국 시장경쟁청은 반도체 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이 인수 거래에 대해 “엔비디아가 혁신을 저해하고 경쟁자들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영국 의회와 정부에서는 “영국 정부 시스템에 ARM 기술을 활용하고 있는 만큼 국가 안보 차원에서 ARM 매각을 불허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U 역시 엔비디아의 독과점 위험을 이유로 인수 심사를 미루고 있다.

이 밖에도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는 지난달 미국에 본사가 있는 매그나칩반도체가 중국계 사모펀드에 매각되는 것을 두고 “미국 국가안보상 위험성이 있다”고 거래 중단을 요청했다. 지난 3월엔 이탈리아 정부가 밀라노의 반도체 기업 LPE 지분 70%가 중국에 매각되는 것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같은 달 중국은 미국의 반도체 장비 기업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가 일본 장비 기업 고쿠사이일렉트릭을 인수하려는 것에 반대해 거래를 무산시켰다. IT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나 바이오 같은 첨단 분야의 경우 자체 공급망을 구축하지 않을 경우 국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국가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이 분야에서 무역 장벽이 앞으로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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