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코로나가 바꾼 일본 시스템

최은경 도쿄 특파원 2021. 9.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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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건널목을 건너고 있다./AP 연합뉴스

새 일본 총리를 뽑는 자민당 총재 선거를 앞두고 각 후보자 정책 검증이 한창이다. 빠지지 않는 항목 중 하나가 ‘록다운(도시봉쇄) 법제화’에 대한 후보자 의견이다. 요즘 일본에선 개인의 이동 제한을 강제할 법적 근거를 만들자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는 지난달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강제로 제한하기는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새 총리 후보자 대다수는 벌써 ‘법제화 긍정 검토’ 의향을 밝혔다.

코로나를 계기로 일본에 최근 거센 개혁 바람이 불고 있다. 록다운 법제화에는 반대하는 스가 총리도 ‘일본 사회 디지털화’ 사업은 밀어붙였다. 이달부터는 ‘디지털청’이라는 새 정부 부처도 출범했다. 지역·기관별로 제각각인 행정 시스템을 국가 차원에서 표준화하고, 국민 개개인의 마이넘버(주민등록번호)와 연계해 관리하는 게 우선 과제다. 한국처럼 주민번호 하나로 각 부처·지자체 온라인 행정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한다는 뜻이다. 새 부처 출범 전 법률 정비도 몇 달 만에 빠르게 마무리했다. 법률에 명기된 행정 절차 날인 의무가 폐지됐고, 개인 정보 관리 및 감시 권한이 중앙정부로 일원화되는 식이다.

일본 사회를 움직인 건 결국 코로나 바이러스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후진적인 일본 사회 시스템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확진자 역학조사, 방역 대책, 재난지원금 수령, 코로나 예방 백신 접종 예약…. 중요한 고비마다 아날로그 문화와 분권화된 시스템이 발목을 잡았다. 최근 도쿄에선 코로나 확산세가 한풀 꺾였는데도 사망자가 연일 10~20명씩 나왔다.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코로나 사태가 진정돼 보건소 직원들이 7~8월 사망자를 보고할 여유가 생겨서 그렇다”고 했다. 방역의 기준이 되는 기본 지표가 현 감염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고백한 셈이다. 이런 일본의 상황을 가리켜 ‘코로나 패전(敗戰)’이란 말도 나온다. 21세기에 다시 맞은 패전 쇼크에 정부도 일반 국민도 입을 모아 변화를 외치는 큰 흐름을 만들었다.

누가 총리가 되든 일본 사회 시스템 개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다만 이 개혁 광풍이 전후(戰後) 일본 사회가 지켜온 시대정신까지 휩쓸어갈지 모른다는 역설적인 우려를 낳고 있다. 위기 상황에도 국가적인 대응보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우선하도록 한 시스템의 근간엔 과거 전화(戰禍)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국가가 전쟁의 비극을 불러와도, 누구도 이를 막지 못했다는 역사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효율적인 위기 대처의 명목 아래 잊어버리기엔 치른 대가가 너무나 큰 교훈이다. 이른바 K방역의 성과가 개인의 권리를 고민할 틈도 주지 않았던 우리 사회도 한번쯤 고민해야 할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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