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世說新語] [641] 만리비추 (萬里悲秋)

“바람 급해 하늘 높고 잔나비 파람 슬픈데, 물가 맑아 모래 흰 곳 새들 날아 돌아오네. 가없이 지는 잎은 우수수 떨어지고, 다함 없는 장강은 넘실넘실 흘러온다. 만리에 가을 슬퍼 늘 나그네 되었으니, 백년 인생 병 많은데 홀로 대에 오르누나. 고생으로 터럭 셈을 괴롭게 한하노니, 쇠한 몸 탁주 술잔 새롭게 멈춘다네(風急天高猿嘯哀, 渚清沙白鳥飛回. 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 萬里悲秋常作客, 百年多病獨登臺. 艱難苦恨繁霜鬢, 潦倒新停濁酒杯).”
두보의 절창 ‘등고(登高)’ 전문이다. 고등학교 시절 “바람이 빠르고 하늘이 높고 잔나비 파람(휘파람) 슬프니”로 풀이한 ‘두시언해’를 통해 배웠다. 안록산의 난 이후 기주(夔州) 땅에 피난 가 살 때, 9월 9일 중구절(重九節)을 만나 높은 곳에 올라 고향을 그리며 지은 시다. 3, 4구의 풍경은 이상하게 오래 생생하게 남아 있다.
5구의 ‘만리비추(萬里悲秋)’는 만리 떨어진 타향에서 가을을 슬퍼한다는 말이다. 가을 바람에 우수수 잎이 진다. 좋은 절기를 맞아 병든 몸을 끌고 누대에 올라, 그래도 한잔 술로 시름을 달랜다. 탁주 한 사발을 따라서 마시려다, 당기던 술잔을 멈추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누구냐? 여기는 어디냐?
김안로(金安老·1481~1537)는 시 ‘석망(夕望)’에서 이렇게 읊었다. “나그네로 가을 슬퍼 게다가 병 앓으며, 좋은 시구 없이 홀로 누대 오름 부끄럽다. 넓은 허공 구름 그림자 물결 물고 흘러가고, 주렴 걷자 산 빛을 새가 이고 돌아오네. 평시엔 세월 항상 빨리 감을 한하더니, 위급한 길 터럭 셈을 재촉함도 혐의찮네. 강호의 저무는 뜻 영락함이 많아서, 황량한 성 고목 위로 해가 홀로 기우누나(作客悲秋更病哉, 愧無佳句獨登臺. 漾空雲影波銜去, 排箔山光鳥帶回. 平歲烏蟾常恨疾, 危塗鬢髮不嫌催. 江湖暮意多搖落, 古木荒城日自頹).”
1, 2구는 두보 시의 5, 6구를 점화했다. 고단하던 시절이었던 듯 5, 6구에서, 평소 같으면 세월이 덧없이 흘러감을 안타까워했을 것이나, 이제는 터럭이 빨리 셈이 싫지가 않다고 했다. 가을볕에 황량한 옛 성 너머로 또 하루 해가 진다. 고향을 갈 수 없는 실향민들에게 만리비추의 망향정(望鄕情)이 깊어지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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