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목욕탕 병우유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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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변두리에도 추석의 즐거움이 가득 깃들곤 했다.
목욕이 끝나면 아버지가 하얀 우유를 한 병 사준다는 점이었다.
병을 기울여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던 목욕탕 우유.
아버지도, 병우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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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변두리에도 추석의 즐거움이 가득 깃들곤 했다. 40년도 넘은 서울 얘기다. 설빔만 있는 게 아니라 추석도 빔이 있어서 까슬까슬한 합섬이나마 새 옷을 얻어 입은 아이들이 괜히 들떠서 동네 어귀를 돌아다녔다. 도시 변두리의 삶이란 것이 어떻게 보면, 객지살이여도 대개는 농촌 고향의 풍습과 태도가 몸에 배 있게 마련이었다. 애들 옷 해 입히고, 먹을 게 없던 시절이긴 해도 시장에서 쌀가루 받아다가 송편은 잘도 빚었다. 애들이 집 밖에 나와 주전부리를 들고 자랑하는데, 이때는 하나같이 약과나 참기름향이 고소한 송편이 들려 있곤 했다. 더러 차례용으로 쓰는 형형색색의 젤리나 '옥춘'(玉春)이라고 부르던 사탕, 웨하스를 먹던 애들도 있었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풍족하던 추석이었다.
집집마다 이른바 '욕실'이 생긴 것도 1980년대의 아파트와 집장수 신식 주택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니, 1970년대 변두리 동네는 목욕탕이 미어터졌다. 때 밀고 있으면 아저씨가 들어와서 고함을 치곤 했다.
"거, 박씨 아저씨! 들어온 게 언젠데 아직도 계시는 거요.(버럭)"
그 박씨 아저씨는 어린 아들들을 달고 들어온 거라 목욕이 길 수밖에 없었다. 착실하게 애들 때 다 벗기고, 자신도 벗겨내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그때 탕은 작지 않았던 거 같은데, 추석과 설 전에는 마치 탕이 고명 푸짐한 국밥처럼 빽빽했다. 물 갈고 할 틈도 없어서, 수영팬츠 입은 직원이 뜰채 가지고 쓱 걷어가면 그만이었다.
목욕탕 가는 걸 어린 내가 좋아할 리 없었다. 탕은 뜨겁지, 간혹 아버지에게 이끌려 '싸우나'에 들어가면 숨이 막혔다. '이태리타올'로 박박 때를 벗겨내면 더러 피부 표피가 다 까여서 며칠 동안 크림을 발라 치료해야 할 정도였다. 좋았던 것도 있었다. 목욕이 끝나면 아버지가 하얀 우유를 한 병 사준다는 점이었다. 동그랗고 두꺼운 종이로 막은, 옛날 우윳병을 기억하시는지. 아버지는 그 뚜껑을 잘도 따셨는데 나는 영 젬병이었다. 얼마나 고소하고 진했던지. 그때 우유가 더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었을 게다. 높은 온도로 세게 살균해서 맛이 더 진했을 것이다. 병을 기울여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던 목욕탕 우유. 우유는 부자의 상징이었다. 좀 사는 집들은 철문을 해서 달고, 배달하는 병우유 들어오는 구멍을 뚫어놓곤 했다. 그 우유 훔쳐 먹으러 다니는 애들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요렇게' 마신다는, 아나운서이자 가수 임성훈씨가 광고하던 테트라종이팩 우유가 병을 대체하면서 이젠 먼 기억으로 사라져 버렸다. 레트로 열풍으로 그때 병우유가 다시 나온다던데, 종이뚜껑은 절대 복원하지 못할 것이다. 뚜껑이 병 안으로 반쯤 잠기거나 쑥 빠질까 싶어서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열던 그 재미가 없으면 옛날 병우유가 아니지 않을까.
귀하던 우유도 요새는 안 팔려서 난리다. 한 해 신생아 백만 명이 넘던 때는 전설이 됐다. 이제는 이십만 명대에 진입했다. 분유며, 생우유며 먹을 아이들이 없다. 그나마 '라떼'라는 이름이 붙은 커피 유행이 수요를 지탱하고 있다니, 우유 짜는 축산업계는 죽을 맛이겠다. 아버지가 사주시던 목욕탕 우유가 생각나던 세대도 이젠 중년, 노년이 되고 있다. 많은 것이 사라졌다. 아버지도, 병우유도.
박찬일 요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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