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트 '초절기교' 선보이는 17세 피아니스트 임윤찬 "콩쿠르·팬 신경 안 써..그냥 내 음악에 집중해요"
[경향신문]
15세 때 윤이상 콩쿠르 최연소 1위
‘괴물’로 주목받으며 팬들 급증
스승 손민수의 스승인 러셀 셔먼 등
거장들의 전통적 피아니즘 지향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마주 앉은 테이블 위에 미국의 피아노 거장 러셀 셔먼의 <피아노 이야기>라는 책이 놓여 있었다. 탁월한 음악교육자이자 인문주의자, 수려한 문장의 에세이스트이기도 한 그는 올해 91세를 맞았다. 한국 출신 제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현재 많이 쇠약하다. 비유법 가득한 명문(名文)으로 빼곡한 <피아노 이야기>는 2009년 한국에 처음 번역·출간됐다가 수개월 전 번역을 더욱 다듬은 개정판이 나왔다. 그 책을 가리키며 임윤찬에게 “다 읽었는가”라고 묻자 그는 약간 수줍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내용이 특히 기억에 남는가”라고 다시 묻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피아노를 칠 때 가장 중요한 손가락은 엄지라는 걸 깨달았죠. 나머지 손가락들은 그 주위를 맴돌 뿐이죠. 또 이런 내용도 있어요.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치열하게 연습해야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모두 버려야 한다고 쓰셨어요.”
문장으로 그 말을 받아쓰면 간결하다. 한데 17세의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아주 느릿하게, 단어를 하나씩 곱씹어가면서 답했다. 첫인상부터 남다른 그는 이른바 ‘세계적 콩쿠르’에서 우승한 적이 아직 없다. 14세였던 2018년에 청소년 콩쿠르 중에서는 치열한 축에 들어간다는 평가를 받는 클리블랜드 청소년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 쿠퍼 국제 콩쿠르에서 3위를 수상한 것이 전부다. 이듬해 국내에서 열린 윤이상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1위를 차지했다. 한데 언제부턴가 비온 뒤의 대숲처럼 팬들이 늘었다. 윤이상 국제 콩쿠르 우승 직후 금호아트홀에서 가진 네 차례 리사이틀이 기폭제였다. 연주회는 전석 매진이었다. 직접 연주를 들은 청중의 입을 통해, 당시 15세의 ‘괴물 피아니스트’에 대한 소문이 퍼져갔다. 해외의 유명 콩쿠르에서 수상해야 비로소 주목받는 한국의 풍토에서 ‘평지돌출’이라고 할 만하다.
25일 통영 시작으로 5차례 연주회
난곡으로 유명한 초절기교 연습곡
“기교 뛰어넘어 서사 만들어낼 것”
임윤찬이 리스트의 ‘초절기교(超絶技巧·인간의 기교를 뛰어넘는) 연습곡’을 선보인다. 25일 통영국제음악당을 시작으로 10월1일 광주 유스퀘어문화관, 5일 대구 콘서트하우스, 7일 성남 티엘아이아트홀, 12일 서울 롯데콘서트홀로 이어진다. 지난 11일 광화문에서 만난 그에게 두 번째로 던진 질문은 “언제부터 피아노를 쳤나”였다. “일곱 살 때”라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좀 더 긴 답변을 채근하자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권해서 아파트 상가에 있는 피아노학원에서 배우기 시작했죠. 연습 과정은 힘들었지만 마지막에 내가 원하는 음악이 나오면 행복했어요. ‘아, 나한테서 이런 음악이 나올 수 있구나’라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어요.”
혹시 집안에 음악가가 있는가를 탐색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엄마가 즐겨듣는 음악은 클래식이 아니라 대중음악”이라면서 “그래서 나도 대중음악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이른바 아이돌을 몇팀 거론하면서 “누굴 좋아하는가”라고 묻자,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튀어나왔다. “김현식이나 김광석이 좋아요. 혹시 유재하 아세요? 가장 좋아하는 가수거든요. 유튜브에서 그분 노래를 듣고 완전히 빠졌어요. 피아노로 편곡해 연주하기도 했어요. 목소리가 개성 있고, 가사와 선율이 순수하고 시적이죠. 요즘 대중음악은 기계적인 음들이 많아 집중해 듣기 어려워요.”
초등학교 시절의 롤모델은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키신”이었다고 했다. “키신은 피아노로 노래하는 타이밍이 절묘하다”면서 “다른 이들은 흉내 내기 어려운 독특한 지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예원학교를 마치고 검정고시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키신에 대한 애호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스승으로 만난 피아니스트 손민수(한예종 교수)를 통해 ‘왕년의 거장’들을 음반으로 접하면서다.
열일곱 살의 입에서 “마리아 유디나, 블라디미르 소프로니츠키” 같은, 고색창연한 러시안 피아니스트의 이름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스승 손민수의 스승인 러셀 셔먼을 거론하고, 20세기 중반의 거장 에드빈 피셔를 마지막으로 언급했다. “올해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에서 모차르트 협주곡 22번을 연주했어요. 피셔가 만든 카덴차(Cadenza·협주곡에서 솔리스트가 혼자 연주하는 즉흥적이고 기교적인 부분)를 연주하고 싶었는데, 너무 옛날 분이어서 악보를 구하기 어려웠죠. 음반을 들으면서 직접 채보해 연주했어요.”
손민수는 이런 제자를 “시간여행자”라고 표현했다. “과거의 올드 스쿨(전통적 피아니즘)을 지향하면서 현재의 많은 피아니스트들과 스스로를 차별화한다”는 뜻이다. “나도 가끔씩 이 어린 제자가 무서울 정도”라고도 했다. 최근 팬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할 만한 나이임에도 임윤찬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면서 “그냥 내 연주에 집중할 뿐”이라고 했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연주가 내내 엉망이었어도 마지막 10초 동안 강렬한 모습을 보여주면 청중은 박수를 치잖아요? 저는 그런 게 싫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스튜디오 녹음이 더 재밌어요. 콩쿠르도 별로 달갑지 않아요. 심사위원들이 음악의 신은 아니잖아요? 음악에는 정답이 없는데 심사위원 각자의 주관으로 순위를 매기는 것에 동의하지 못해요. 선생님이 콩쿠르에 나가라면 끝까지 거부할 순 없겠지만, 그렇다고 우승에 집착하진 않아요. 그냥 제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이번에 선보이는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은 난곡으로 유명하다. 임윤찬은 “테크닉도 중요하겠지만, 기교를 뛰어넘는 서사를 만들어내야 진정한 초절기교”라고 했다. 글로 적어놓으니 어떤 답변들은 도발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열일곱 살 피아니스트는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모든 질문에 느릿하게 답했음을 밝힌다. 모두 12곡으로 이뤄진 ‘초절기교 연습곡’ 외에 리스트의 <순례의 해> 가운데 2권 ‘이탈리아’ 중에서 4, 5, 6곡도 연주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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