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영웅들 삶에서 '착하게 아니라 지혜롭게 살라' 배웠죠"

강성만 2021. 9. 2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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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짬] 원로정치학자 신복룡 전 석좌교수
지난 17일 한겨레신문사를 찾은 신복룡 교수가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원로정치학자 신복룡(79) 전 건국대 석좌교수는 최근 젊은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을 이뤘다. 지난 2월 나관중의 <삼국지>(전 5권, 집문당)에 이어 이달 초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전 5권, 을유문화사)을 번역 출간해 동서양의 대표적인 영웅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고향인 충북 괴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이 가난해 고교 진학을 못한 채 서울 을지로 작은 구멍가게에서 점원을 했어요. 그나마 돈이 몇 푼 생기면 근처 청계천 고서점을 찾았죠. 그때 처음 만난 <삼국지>에서 인생 선배들이 삶의 고난을 어떻게 견디고 이겼는지를 배웠어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대학에 입학한 1961년 박시인 선생 완역본으로 처음 만났죠.”

지난 17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신 교수는 “두 영웅전에 몰두했던 것은 젊은 날 제 삶이 고달팠기 때문일 것”이라며 “제가 이나마 사람 노릇을 하고 살도록 가르침을 준 책은 두 영웅전과 <장자>, <나폴레옹 평전>(루트비히 작)”이라고 말했다.

신 교수가 최근 완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플루타르코스(46~?)가 서기 100년쯤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페리클레스, 알렉산드로스, 카이사르, 안토니우스, 키케로 등 그리스·로마 전쟁영웅과 정치가 50명의 생애가 담겼다. 인물의 업적 나열에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일화와 언행이 풍부히 담겨 ‘영웅’의 진짜 모습을 살피고 서양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신 교수는 1980년대부터 20여년 동안 번역 준비를 했고, 본격적인 번역은 2007년 건국대 정외과에서 정년 퇴임하고 시작했단다. “교수로 있는 동안 판본 13종을 구입해 비교하고 주석과 참고 자료를 마련했어요. 퇴임한 뒤부터 낮에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밤에는 <삼국지>를 옮겼죠.”

그는 자신의 완역본이 이전 번역서들과 다른 점을 두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비교 평전’이 포함된 점”이라고 말했다. “영웅전 첫 활판본이 1517년 나올 때까지 파피루스와 양피지 필사본이 많이 소실돼 애초 서술 인물도 100명에서 50명으로 줄고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카이사르의 비교’와 같은 비교 평전도 4편이나 누락됐어요. 훗날 프랑스 가톨릭 주교 자크 아미요가 필생의 노력으로 이 비교 평전을 복원했죠. 프랑스어판 영웅전에만 나오는 이 부분을 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옮겼어요. 플루타르코스가 인용한 그리스·로마 고전 190종을 모두 찾아 주석 처리한 것도 기존 책과 다른 점이죠.”

그는 그리스·로마 영웅전 속 인물들은 영웅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서 장엄함과 비장함을 보여준 사람들이라며 이들의 삶에서 자신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선행이 반드시 이기지는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다. “플루타르코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착하게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살아라. 당신도 악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그때 지고 나중에 저쪽이 나빴어, 라고 원망하지 말라’는 것이죠.” 착한 삶과 지혜로운 삶에 대해 신 교수는 말을 이었다. “착한 사람은 악인 앞에 무력해요. 착한 삶은 등에 칼을 맞고 괴로워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칼을 피합니다. 악은 선행으로 응징할 수 없어요. 지혜롭고 담대해야 가능하죠. 역사가 발전하는 만큼 악도 발전합니다.”

독실한 가톨릭교도인 그는 “기독교에서도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성경의 솔로몬 지혜서를 봐도 뱀처럼 지혜롭게 살라고 했다”며 ‘지혜와 거리가 있었던 한국 기독교’의 흔적을 되짚었다. “구한말에 외국인이 쓴 책을 보면 ‘한국 기독교도는 티미드(timid, 소심한)하다’는 말이 많아요. 망국과 같은 결정적인 순간에 멈칫했다는 거죠. 제임스 게일 목사는 책에서 ‘한국 기독교도들은 망국을 개 쳐다보듯 했다’고도 했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5권 완역
지난 2월 나관중 ‘삼국지’ 전집 이어
동·서양 대표 인물전 번역 ‘기록’
“가난탓 고달팠던 젊은 날의 꿈 이뤄”

누락됐던 ‘비교 평전’ 부분 첫 소개
“청년기 우정·야망·정의감 감명”

그는 영웅전 인물들에 대해 “우리와 꼭 같은 역경을 체험한 필부들”이라며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더 많이 읽었고, 처절한 인내와 지혜로 고난을 이긴 점”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애지중지한 제자 알렉산드로스는 엄청난 독서가였어요. 그가 바빌로니아 원정 때 스승이 <정치학> 책을 내자 ‘그 책은 나만 읽는 것으로 충분했을 텐데’라며 스승을 원망했을 정도였죠.”

신 교수는 오늘날 젊은이들이 영웅전에서 ‘애국심과 청년기의 우정과 야망, 죽음을 초월하는 정의감’을 읽어내길 바란다며 로마 명장 코리올라누스에 대한 이야기를 풀었다. “로마 대장군으로 혁혁한 무공을 세웠으나 정적의 모함에 빠져 추방된 코리올라누스는 적군 대장군이 되어 조국을 향해 복수전을 합니다. 그때 그의 어머니가 손주들을 이끌고 아들 앞길을 막고 ‘네가 조국을 유린하려거든 이 어미 시체를 밟고 지나가라’고 해요. 아들은 이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적국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죠. 영웅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입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하사받은 영웅전에서 코리올라누스 편을 읽은 뒤 그의 생애를 희곡으로 씁니다. 로마를 일으킨 것은 위대한 어머니들이었죠.”

동학사상의 민족주의 연구로 모교인 건국대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신 교수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나서 죽을 때까지 다닌 곳을 샅샅이 누비며 <전봉준 평전>(1982)을 썼고, <한국분단사연구>(한울, 2001)와 <한국정치사상사>(지식산업사, 2011) 같은 굵직한 학술서도 출간했다. 그가 우리말로 옮긴 한말 외국인 기록 23권은 한국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을 받는다.

“나는 정치학자라기보다는 역사가”라는 신 교수는 번역에 힘쓴 이유를 두고 “외국인이 쓴 한국 관계 여행기나 포교·의료·탐험을 주제로 한 책을 자료 삼아 한국사의 외연을 확장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 역사는 <고려사>나 <삼국사기> 또는 <조선왕조실록>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편의 가치가 있어요. 이런 부분은 한국사 연구의 맹점인 대롱시각(좁은 시야로 역사를 보는 것)으로는 풀 수 없어요.”

한말 외국인 기록 23권 중에서 의미가 큰 책을 묻자 그는 <금단의 나라>(E. J. 오페르트)와 <한국의 야생동물지>(베리만)를 꼽았다. “<금단의 나라>는 대원군 생부의 묘를 도굴한 독일 유대인 상인 오페르트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문화인류학적 분석을 한 책입니다. 스웨덴 출신 베리만이 쓴 동물지에는 조선 동물 화보가 120장이나 나옵니다. 베리만은 나중에 자국 박물관에 한국관도 만들었죠.”

신 교수에서 한국 현대사 인물 중 한 명을 영웅전으로 다룬다면 누구냐고 묻자 혁신계 정치인이었던 고정훈(1920~88) 선생을 꼽았다. “한국 현대사를 가장 압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이죠. 일본 유학을 가 영어를 배웠고 만주 하얼빈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해방정국에 소련군 통역관으로 일하다 남하해 미군 첩보부대(KLO)에 몸을 담았고 뒤에 진보 정치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죠.”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해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중국 광둥어로 얼룩진 성경을 고쳐 쓰고 있어요. 연말쯤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신학 문제는 개입하지 않고 표기나 표현, 문법이나 서술이 틀린 부분을 고쳤어요.”

인터뷰 끝에 학자로서 살아온 지난 삶의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중학교를 나와 진학하지 못하고 산에 올라 땔감을 해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 데 멀리 신작로를 보니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친구들이 가방을 메고 길을 가더군요. 그때 느낀 심정이죠.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는 고드름으로 배를 채우기도 했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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