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빌딩·강남 명품관 수놓은 '힙한 청년미술'

노형석 입력 2021. 9. 22. 18:46 수정 2021. 9. 2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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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윤·이아현·현남 개인전
단절·격리로 채워진 일상서
디스토피아의 세계 등 표현
이아현 작가의 신작 그림 <우리는 이런 상황을 또 반복한다>의 일부분. 작은 곤충이 겹눈을 통해 바라본 거대한 세상의 단면들을 작가 나름의 상상력으로 그려냈다.

‘무섭고 집요한 아이들’이 전시장에 나타났다.

이들의 그림과 조형물은 뚝 잘라 표현하기 어렵다. 요사이 경매에서 휙휙 팔려나가는 일부 청장년 인기 작가들의 깔끔한 변종 팝아트와는 결이 다르다. 이들은 단절과 격리로 채워진 일상 앞에서 인간 아닌 곤충의 눈에 들어온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떠올린다. 도가니가 된 화폭과 조형물 안에 번개처럼 내리치는 불안감과 여러 색조와 형체의 감정들을 부글거리며 뒤섞는 혼종적 장면도 표현해낸다.

한국 청년미술 동네가 근래 배출한 ‘무섭고 집요한 아이들’의 작업이 ‘힙하다’는 서울 을지로 거리의 낡은 빌딩과 강남 신사동 도산공원 근처 패션명품관에서 펼쳐지고 있다. 주된 무대는 옛 다방식 와인바와 루프톱 카페로 입소문난 을지로3가 이화빌딩 3층 전시장 ‘공간 형’. 이곳에 ‘휘 휘 스프를 저어’란 제목으로 차린 이서윤 작가의 신작 회화전과 ‘드러난 땅에 살고 있어요’란 이아현 작가의 ‘조형물+그림’전(모두 26일까지)이 차려졌다. 스타 작가 등용문으로 알려진 강남구 신사동 에르메스 아뜰리에 전시장에는 지난해 공간 형에서 전시했던 현남 작가의 조형물 신작전 ‘무지개의 밑동에 굴을 파다’(10월3일까지)가 열리는 중이다.

서울 을지로3가 이화빌딩 3층 ‘공간 형’에 차린 이아현 작가의 개인전 현장. 사람 아닌 곤충의 눈으로 본 세상의 풍경을 상상해 그린 큰 평면 그림들과 풍경 이미지 일부를 떼어 따로 부각시킨 작은 조각 그림, 조형물 등이 뒤섞여 있다. 일부 조각 그림은 걸지 않고 직접 제작한 좌대 위에 비스듬하게 놓거나 벽에 기대어 놓았다.

이아현 작가 전시장에 들어서면 여느 화가의 전시와는 전혀 다른 작품 배치를 보게 된다. 곤충의 겹눈으로 바라본 거대한 세상과 일상의 이미지들을 큰 그림에 풀어놓고, 그중 특정한 이미지들을 작은 조각 그림과 기괴한 형상의 조형물로 뽑아 따로 뒤섞어 늘어놓으면서 그로테스크한 난장의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일부 조각 그림은 걸지 않고 직접 제작한 좌대 위에 비스듬하게 놓거나 벽에 세워 놓았고, 내걸린 그림도 일부는 사람 눈높이가 아닌 날거나 기는 곤충 눈높이를 의식한 듯 천장부와 바닥면 근처에 붙여 놓았다. 어지러운 느낌도 들지만, 훑어보면 특유의 관점이 지닌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이서윤 신작전의 주요 출품작 중 하나인 <나뭇가지를 뱀으로 착각하는 쪽이 안전합니다>의 일부분.

옆 전시장의 이서윤전은 지구 생명체가 수프와 번개의 만남에서 시작됐을지 모른다는 가정 아래 1953년 원시수프 모형을 실험한 미국 과학자 스탠리 밀러의 아이디어에서 착상했다. 일상의 단상들을 날래게 휘두른 붓질 선으로 표현하면서 휘젓듯 그린 작품들이다. 격리와 단절이 일상화한 가운데 작가가 발견하고 느낀 다양한 단상과 현상들을 상상으로 뒤섞고 조합하면서 수프 같은 이미지 잡탕을 만들어냈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에르메스 아뜰리에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현남 작가의 출품작들. 가까운 정면에 보이는 작품이 에폭시와 폴리스티렌으로 만든 <파노라마>(2021)이고 뒤쪽에 보이는 작품이 같은 재료들로 만든 <기지국>(2020)이다.
현남 작가의 에르메스 전시장 모습. 정면 앞에 보이는 <기지국> 뒤로 원형 조형물 <파노라마>를 비롯해 탑과 뭉친 덩어리 형태의 조형물들이 보인다. 벽면에 붙은 대형 사진은 현 작가가 만든 조형물의 세부를 찍은 것들이다.

현남 개인전도 이아현 작가처럼 디스토피아를 이야기한다. 열린 듯하지만 소통이 단절된 21세기 도시 풍경을 수직축 건축물이나 수석, 분재를 연상시키는 덩어리 모양새의 합성수지 조형물로 압축한 ‘축경’ 조형물들로 드러냈다. 앞서 작가는 지난해 공간 형에서 열린 개인전 ‘축경론’에서 수석과 분재 등 전통 생활문화 산물들을 왜곡한 작업을 내보인 바 있다. 당시 출품작들은 에폭시 등의 합성수지 재료와 금속 조각들을 뒤섞어 녹여 넣거나 부풀리고 바스러뜨리는 등의 과정을 거쳐 만든 ‘괴덩어리’들이 좌대 위에 늘어선 얼개였다. 이 전시 또한 비슷한 작업물들과 더불어 도심 곳곳에 들어선 휴대전화 기지국 안테나의 기괴한 모습을 반영한 조형물들과 사진들을 함께 전시하고 있다. 산업문명 재료인 합성수지 속을 파들어가 다른 수지 재료를 넣고 녹이거나 태운 이미지를 풍경으로 재해석한 착상은 독창적이면서도 종말론적인 느낌이 짙게 감돈다.

‘공간 형’의 또 다른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이서윤 작가의 신작전 현장. ‘휘 휘 스프를 저어’란 이색 제목을 달았다. 코로나 감염 사태에 따른 격리와 단절의 상황 속에서 작가는 눈으로 발견하고 느낀 다양한 단상과 현상들을 상상 속에서 뒤섞고 조합하면서 휘휘 젓는 스프와 같은 상태의 이미지 잡탕을 만들어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구상에서 추상으로 흘러간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중간 고리 구실을 한 것은 1948년 김환기, 이중섭 등이 결성한 신사실파 동인이었다. 60여년이 지나 시장이 장악한 지금 미술판에서 디지털의 상상력으로 무장하고 나타난 ‘엔세대(Net Generation·온라인 네트워크 환경에서 성장한 세대) 신사실파’ 작가들이 21세기 미술사의 새 고리 구실을 해낼 수 있을까. 눈여겨보며 응원할 만하다.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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