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형의 여담] 에든버러, 맥스웰의 도시
[김민형의 여담]
김민형|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꼽힌다. 기괴하게 우아한 종교 건축과 다용도 석조 건물 가득한 중세 도시의 아담한 골격을 현재까지 보존하고 19~20세기의 급격한 경제·사회적 변화와 21세기의 진보적인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사방으로 푸른 자연에 여전히 둘러싸여 있는 분위기는 드문 미학적 평형을 성취하는 것이 사실이다. 시내에서 멀지 않은 해안 길을 따라가면 해산물 풍부한 작은 마을과 거친 물결, 그리고 아기자기한 해양생물 보호구역이 도시의 지형을 보완한다.
12세기에 처음 지었다는 장엄한 에든버러성은 높은 언덕 위에서 바다 방향을 내다보고, 그 주위로 기슭을 따라서 각양각색 건물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정상에서 구부러진 골목길을 따라 북쪽으로 내려가면 사람과 차량으로 혼잡한 프린스로가 나오고, 그 길을 건너면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반 무렵까지 건설된 신도시 ‘뉴타운’이 시작된다. 조지언 양식의 계단식 건물들이 줄 서 있는 뉴타운은 스코틀랜드에서 특히 활발하던 계몽주의 경제의 산물로서, 그 당시 부흥한 상인과 장인 계층 시민들의 주거환경을 개선할 목적으로 널찍한 도로와 길쭉한 공원 몇개를 평행으로 배치해 지금 봐도 도시 계획이 조화롭다.
뉴타운 중심부에 있는 인디아로 14번지를 지난주에 찾아보았다. 평범한 외관의 이 회색 사암 건물에서 과학자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1831년에 태어났다. 입구 옆에 붙은 작은 기념패에 전자기학과 관련된 그의 업적이 짧게 소개되고 ‘맥스웰로 인해서 과학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평판하는 아인슈타인의 인용구가 새겨져 있다.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수리물리학자 중 한명인 맥스웰은 패러데이, 앙페르, 가우스 등의 실험과 이론을 융합하는 구조적인 프레임을 구축함으로써 정전기, 자석, 전류 등이 근본적으로 전자기장이라는 하나의 현상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명백하게 밝히고 전자기장의 성질과 변화를 기술하는 방정식 체계를 발견했다. 지금은 ‘맥스웰 방정식’이라고 알려진 이 이론에 대해서 내가 학부 때 공부한 일반 물리학 교재에 전자공학자 존 아르 피어스의 말이 다음과 같이 인용돼 있었다. “실용적인 관심사를 조금이라도 초월한 사람이라면 스스로의 영적인 충족을 위해서라도 맥스웰의 방정식을 이해할 가치가 있다.” 맥스웰 방정식의 주요 산물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많은 과학자가 그로 인해 빛의 기본 성질이 처음으로 밝혀졌다는 점을 이야기할 것이다. 빛이라는 것은 인간 경험의 가장 근본을 이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업적의 어마어마한 파급 효과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을 본다는 것은 여기저기서 생성되는 빛이 우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우리의 눈에 와서 부딪히는 것이다. 그 현상의 본질을 맥스웰이 역사상 처음으로 정확하게 기술한 것이다.
내가 그 집에 간 이유는 지금 일하는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가 이 건물의 일부를 방문자 사무실로 임대하기로 해서 현지 답사차 들렀던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평소에 운영하는 전시실이 오래 닫혀 있는 기색이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 2층의 큰 회의실 두개와 3층 연구실 세개만 돌아볼 수 있었다. 홍보물의 일부는 복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현 소유주인 맥스웰재단과 건물의 역사에 대해서 약간 읽을 수 있었다. 1977년에 미국 렌설리어 공과대학 교수 시드니 로스의 개인 자금을 기반으로 시작한 재단은 과학 연구나 교육과 관련된 작은 규모의 자선 활동을 주로 해왔는데, 1993년에 당시 개발 이사장이었던 데이비드 리치 교수의 노력으로 각종 스코틀랜드 산업체의 기부금, 정부의 융자금을 끌어모아서 맥스웰의 생가를 살 수 있었기에 일종의 물질적인 밑천과 정통성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밀레니엄 행사가 세계 방방곡곡에서 열리던 2000년에 아이오피(IOP)출판사의 잡지 <물리 세계>가 물리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물리학자는 누구인가’란 설문조사에서 맥스웰은 아인슈타인과 뉴턴 바로 다음으로 3위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사람들 중에 맥스웰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상당히 소수라는 인상이다(물론 내가 설문조사를 해본 일은 없다). 그의 업적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지식인 중에서도 드물다. 이런 전통과 여건 속에서야 맥스웰재단이 한 개인의 노력으로 설립되고 현재도 적은 기부금의 조합과 임대료로 어렵게 운영된다는 사실이 전혀 놀랍지 않다. 가을 이때쯤이면 노벨상이 발표될 텐데, 한국인의 수상 가능성에 대해 온 국민이 관심을 가지고 기대하는 우리나라와 대조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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