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히 중첩된 선..그속에 숲·바다·하늘 보인다

전지현 2021. 9. 2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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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식 학고재 개인전 '현玄'
목판에 레진 붓고 선 그어
10차례 반복해 아득함 표현
"선과 선사이는 심연의 공간"
화면 모서리 각도 23.5도는
보이지 않는 지구 자전축 비유
화면에 무수한 선을 그어 심오한 공간을 표현하는 작품 `Who likes YJ color?` 연작 옆에 서 있는 김현식 작가. [사진 제공 = 학고재 갤러리]
멀리서 보면 그냥 반짝거리는 초록 화면이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무수히 많은 선들이 보인다. 선과 선 사이에는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아득한 공간이 나타난다. 대나무 숲 특징을 압축한 추상화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서울 학고재 갤러리 개인전 '현 玄'에서 만난 김현식(56)은 "작가로서 내 역할은 작품 속 공간까지 관객을 안내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 무엇을 보는가는 관객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김현식 A-3. Who Likes YJ Color [사진 제공 = 학고재 갤러리]
전시 제목 玄은 검을 현이 아니라 심오한 현이다. 고대 중국 사상가 노자는 "현은 온갖 신묘함의 문"이라고 했다. 모든 것을 품은 절대 공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공간을 화면에 구축하기 위해 레진(resin)을 붓고 말리고 송곳 같은 뾰족한 도구로 선을 긋는 행위를 반복한다. 목판에 색을 칠하고 닦아내면 긁힌 곳 사이에 스며든 색이 남는다. 여기에 또다시 레진을 붓고 같은 과정을 10여 차례 반복하면 셀 수 없이 많은 선이 나타나 평면을 입체 공간처럼 바꾼다.

작가는 "내가 진정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대상이 아닌 선과 선 사이의 공간"이라며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에 다다르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작품 옆에서 보면 참나무틀이 함지박 형태여서 입체감을 더한다. 예전에는 모서리가 직각으로 떨어졌지만 2018년 말부터는 23.5도 기울어진 나무틀을 쓴다. "23.5도는 지구 자전축이 기울어진 각도예요. 이렇게 기울어져서 밤낮 길이가 변하고 계절이 변하죠. 우리 눈에는 자전축이 보이지 않지만 삶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실제로 볼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라는 원론적인 질문을 하면서 작업을 해왔어요."

김현식 Beyond the Visible [사진 제공 = 학고재 갤러리]
3년 만의 학고재 갤러리 개인전에서 평면 속 공간을 더 넓고 깊게 구현했다. 원색을 쓴 이전 작품과 달리 검은색(흑)과 흰색(백)을 쓴 신작도 내놓았다. 전시장 입구에 노란색(황), 붉은색(적), 푸른색(청)과 더불어 한국 전통 오방색 화면을 나란히 배치했다. 그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오방색 작업으로 관람객이 가까이 다가오게 하기 위한 것"이라며 "보이지 않는 본질과 보이는 형상 사이의 기운이나 섭리를 표현하는 현(玄) 작업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김현식 Beyond the Visible [사진 제공 = 학고재 갤러리]
화면 전체에 심오한 현을 표현해오던 그는 이번에 작품 일부에 아크릴 물감을 칠한 'Beyond the Visible(보이는 것 너머)' 연작을 처음 선보였다. 도시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작품에 녹였다고 한다. 건물은 검은색 물감, 하늘은 푸른색 현 작업으로 표현했다. 건물이 있어서 하늘이 더욱 멀고 아득해 보인다.

작가는 "인물이나 건물 등 대상에 주목하는 경우는 많아도, 건물 사이로 보이는 빈 공간에 주목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며 "내 작업은 처음부터 배경을 표현하려는 목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레진으로 제작해 광택이 있는 화면은 관객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원형 레진 작품 300점을 설치한 '거울' 연작들이 장관을 이룬다. 관객은 작품 표면에 비친 자기 모습과 작품 공간 사이를 넘나든다.

김현식 작가 개인전
"잔 속 동그란 찻물에서 영감을 얻었어요. 저를 비추는 샘물 같기도 했죠.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전에는 몰랐던 감정을 깨닫게 됐던 그리스 신화 속 나르시스처럼 모든 것을 품은 현 속에서 새로운 자신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심연을 만드는 데 혹독한 육체 노동이 필요하다. 수없이 선을 긋다 보니 어깨와 두 팔이 성치 않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지만, 내 이야기를 풀기 위해서는 조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작업해야 한다. 색은 예민하기에 어떤 식으로 겹쳐져서 어떠한 느낌이 날지는 작가만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10월 17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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