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 <19>박 대통령, 초대 소장에 최형섭 박사 임명

김현민 2021. 9. 22.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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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2월 3일 박정희 대통령(왼쪽)이 최형섭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초대 소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1966년 2월 2일. 한국 과학기술의 메카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이날 발족했다. 한·미 두 정상이 지난해 5월 18일 미국 워싱턴에서 발표한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에 과학기술연구소 설치를 발표한 후 9개월여 만이다. 당시 미국 대외원조기관에서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계획에서 사업 승인을 받아 집행할 때까지 최소 3년이 걸렸다. 관행으로 보면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은 미국 대외원조사업 가운데 최단 기록이었다. 한·미 두 정상의 공동성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개인 자격으로 이날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자로 재단법인 신청서를 경제기획원에 제출했고,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은 접수 당일 재단 설립 허가증을 발부했다. 경제기획원은 2월 3일 오후 회의실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창립 이사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설립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임명한 당연직 이사를 비롯해 선임이사, 감사 등 11명이 참석했다. 이사들은 임시 이사장으로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 간사장에 전상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현 삼전복지재단 이사장)을 각각 선임했다.

이사회는 곧바로 초대 소장을 선임했다. 이미 설립자인 박정희 대통령이 주무장관인 장기영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제청한 최형섭 박사(전 과학기술처 장관)를 내정한 상태였다. 김학렬 임시 이사장이 이사회를 진행했다. “초대 소장을 추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형섭 박사를 추천합니다.” “다른 의견 없습니까? 최형섭 박사를 초대 소장으로 선출했음을 선포합니다.”

이사회는 30여 분 만에 끝났다. 이사진은 곧장 소장 임명식에 참석하기 위해 청와대로 출발했다. 임명식은 장기영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와 문교부 장관 등 관계 부처 장관과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등 비서진이 배석한 가운데 청와대 본관 남쪽 접견실에서 거행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초대 소장인 최형섭 박사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초대 소장인 최형섭 박사는 한국 과학기술 강국 설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최형섭 박사는 일본 와세다대학 이공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해 경성대학과 해군사관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했으며, 국산 자동차 기술고문으로 일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군에 입대, 공군 항공수리창장으로 근무했다.

휴전이 되면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국 노터데임대, 미네소타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국산자동차 부사장을 지낸 뒤 원자력연구소 1급 연구관, 상공부 광무국장을 거쳐 금속연료종합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다. 정부는 1962년 4월 최형섭 박사를 원자력연구소장으로 임명했다. 소장으로 재임하면서 서울대 원자력공학과 1회 졸업생 전원을 연구원, 공군 기술하사관 40여명을 기능공으로 각각 채용하고 공학 기술과 기초과학이 융합한 선진 연구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최형섭 소장은 대쪽 성품에다 원칙에 충실했다. 청렴한 데다 리더십도 뛰어나 과학기술계의 신망이 높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형섭 소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두 가지 당부를 했다. 최형섭 박사가 1995년에 펴낸 회고록의 증언이다. “박 대통령은 제게 두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는 예산을 얻으려고 경제기획원에 드나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인사 청탁을 절대 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국회의원 청탁을 조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대통령은 '최 박사는 원칙이 강해 남의 말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혹시라도 거북한 일이 있으면 내게 말하시오'라고 하셨습니다.”(불이 꺼지지 않은 연구소)

박정희 대통령은 이어 바로 옆방에서 다과회를 베풀고 환한 표정으로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눈 뒤 대화 시간을 가졌다. 박 대통령은 참석자들에게 “나는 우리가 살 길은 기술 개발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구소 설립 과정에서 그동안 누차 한 말이지만 내가 직접 챙길 생각입니다”라고 말했다.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던 박정희 대통령은 전상근 국장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전 국장, 이따 내 집무실로 잠깐 왔다 가시오.” 전상근 국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런 지시에 한순간 당황했다. 대통령의 의중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부처 국장을 대통령이 집무실로 부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전상근 국장은 김학렬 차관에게 이런 내용을 보고한 다음 “차관님, 저와 함께 집무실로 가시지요”하고 말했다. 김학렬 차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러자”며 답했다. 다과회가 끝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자들과 인사한 뒤 퇴장하자 전상근 국장은 의전비서관에게 다가가 대통령 지시를 전했다. 전상근 국장은 김학렬 차관과 함께 의전비서관의 안내로 대통령 집무실로 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반갑게 전상근 국장과 김학렬 차관을 맞이했다. “어서 와요, 전 국장. 이번에 수고가 많았어요.” 박정희 대통령의 칭찬과 격려에 전상근 국장은 감개무량했다. “세종대왕은 학자들을 집현전에 모아 놓고 한글을 창제하셨지만 우리는 유능한 과학자들을 연구소에 모아 놓고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조국 근대화'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참다운 근대화는 과학기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국장,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연구소 건설 과정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청와대로 즉시 연락하세요. 연구소 설립은 내가 추진하겠소.”

전상근 당시 국장의 증언. “대통령 집무실을 나서면서 그 순간만큼 공무원으로서 보람과 자부심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튿날인 2월 4일. 연구소는 이날 제2회 임시 이사회를 열고 이사장에 김병희 인하공대 학장을 선임했다. 당연직 이사는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 △이철승 상공부 차관 △성동준 문교부 차관 △버스틴 주한 유솜 차장 △토머스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장 등이다. 산업계 이사로는 △김용원 경제인협회장 △이량 서울대 공대학장 △정인욱 강원산업 사장 △최형섭 기술연구소 소장 등이다. 감사는 이창석 전 교통부 차관을 선임했다. 간사장은 전상근 경제기획원 기술관리국장이 맡았다.

그해 2월 10일 한국과학기술연구소는 법원에 정식으로 등기를 끝냈다. 연구소가 출범했지만 당장 일할 사무실조차 없었다. 최형섭 박사의 회고록 증언. “참으로 난감했다. 소장으로 임명만 받았지 돈도 직원도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기획원에서도 언제 돈을 주겠다는 확답을 해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경제기획원에서 직원 한 명과 비서업무를 담당할 직원 한 명, 나를 포함해 모두 세 명이 일을 시작했다. 내가 일하던 원자력연구소에서 이민하 당시 기획조사과장과 안명주 계장이 여러 가지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두 사람이 나중에 연구소 창설요원으로 수고를 많이 했다.”(불꺼지지 않는 연구소)

어느 날 한일은행 동대문 지점장이 최형섭 소장을 찾아왔다. “소장님 저희 은행 사무실을 내 드릴테니 사무실로 사용하십시오.” “돈이 없어서 임대비를 낼 형편이 못 됩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해 4월 1일 최형섭 소장은 서울 종로5가 한일은행 동대문지점 2층 사무실로 이사해 업무를 시작했다. 건물 옆에 어물 시장이 있어서 비린내가 심했다. 2개월 후 경제기획원에서 돈이 나왔다. 그 돈을 동대문지점에 예치했다. 지점은 연구소 덕분에 실적이 크게 올랐다. 그 지점장은 그런 걸 예상하고 최형섭 소장에게 사무실을 제공한 것이었다. 최형섭 소장은 이듬해인 1967년 1월 사무실을 서울 종로구 종로2가 서울기독교청년회(YMCA) 건물로 이전했다.

최형섭 소장이 취임하자 기다렸다는 듯 국회를 비롯해 여기저기서 인사 청탁이 한 보따리 들어왔다. 최형섭 소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말을 믿고 이들 가운데 단 한 사람의 인사 청탁도 들어주지 않았다. 과학기술연구소 건설 공사를 시작한 이듬해 정부에 예산 신청을 하고 난 며칠 후 김학렬 경제기획원 차관이 전화를 해 왔다. 신청한 내년도 예산 10억원 가운데 부득이한 사정이 생겨서 2억원을 삭감하겠으니 양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최형섭 소장은 “예산은 정부에서 배정하는데 내가 말한다고 될 일도 아니니 알아서 하세요. 다만 그만큼 사업 규모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는 정부가 예산계수 조정을 하고 국회로 넘기기 전에 대통령에게 예산편성 내용을 보고했다. 그해 하반기 어느 날 김학렬 차관이 청와대에서 새해 예산 규모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가 끝날 무렵 박정희 대통령이 김학렬 차관에게 물었다. “김 차관, 조금 전 과학기술연구소 예산이 얼마라고 했소?” “8억원입니다” “원래 신청액은 얼마였소?” “10억원이었지만 최 소장과 의논해 8억원으로 삭감했습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딱 잘라 지시했다. “애초대로 10억원으로 해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삭감된 예산은 전액 되살아났다. 이후 연구소에서 신청한 예산은 경제기획원에서 단 한푼도 손대지 않고 원안대로 편성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언제나 과학기술연구소를 최대한 지원했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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