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석권한 '오징어게임', 어째서 국내 반응은 극과 극일까

정덕현 칼럼니스트 입력 2021. 9. 22. 15:10 수정 2021. 9. 22.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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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보는 시각에 따라 불편함과 통쾌함이 나뉘는 건

[엔터미디어=정덕현의 네모난 세상]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의 반응이 심상찮다. 넷플릭스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 패트롤에 의하면 지난 21일 미국 넷플릭스 톱 10 TV프로그램 1위에 <오징어 게임>이 올랐다. 전 세계 각국에서도 대부분 1,2위를 기록했다. 미국 비평사이트인 로튼토마토 지수는 100%, IMDB 8.3점(10점 만점)으로 평단 반응 또한 폭발적. 흥행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다.

물론 국내에서도 반응은 뜨겁다. 넷플릭스 국내 순위 1위에 올라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반응은 극과 극의 호불호가 갈린다. 한국 드라마로 이런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는 사실에 '황동혁 월드'에 대한 찬사가 나오는 반면, 기대에 못 미쳤고 시대착오적인 내용들이 불편하다는 정반대의 반응들도 나온다. 어째서 <오징어 게임>은 해외에 달리 국내에서 극과 극의 반응이 나오는 걸까.

그 근본적인 이유는 <오징어 게임>을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서 비롯된다. 서바이벌 생존을 담은 이른바 '데스게임' 장르에 익숙하고 그래서 게임 자체에 집중하는 시청자라면 <오징어 게임>이 가져온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부터 '뽑기', '구슬게임', '줄다리기', '오징어 게임' 같은 게임이 너무 심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미 우리가 다 아는 단순한 게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오징어 게임>을 '데스게임' 장르로 보면 생기는 아쉬움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단순한 게임 소재들을 가져온 <오징어 게임>은 데스게임 장르의 생존하느냐 못하느냐의 짜릿한 자극을 즐기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단순하지만 살벌한 룰이 적용되는 게임판을 통해 그것이 바로 현실이라는 걸 은유하는 사회극에 가깝다. 물론 데스게임 장르의 묘미를 재미요소로 가져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게임 자체가 아니라, 그 게임이 은유하는 세상을 보려는 게 목적이다.

그래서 <오징어 게임>의 긴장감은 알 수 없게 진행되는 게임의 복잡성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게임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결과가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데서 만들어진다. 이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양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은유다. 즉 세상이 살벌한 건 복잡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 세계가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럿이 살아가며 부대끼는 경쟁사회에서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거기서는 누구든 이길 수 있고 질 수도 있다는 것을. 다만 무서운 건 경쟁사회 자체가 아니고, 그 결과다. 우리의 현실은 진 자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

<오징어 게임>에서는 마치 현실 사회에서는 없는 공정, 자유, 평등 같은 가치를 내세워지고, 그걸 어길 때 눈앞에서 즉결심판 당하는 '실행'으로까지 이어지지만 그것이 어딘가 잘못되었다 여겨지는 건 공정, 자유, 평등 같은 가치가 근본적으로 불완전함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건 경쟁사회가 그런 가치들에 의해 움직이긴 해도(그런 가치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지만),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현실의 경쟁 속에서는 다양한 딜레마 상황을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그래서 승자와 패자가 나눠진다고 해도 즉결심판이 주는 불편함은 그 잔혹함 때문만이 아니라 그 승패의 결과로 이어지는 패자의 사망선고와 승자독식 구조가 주는 불편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징어 게임>은 게임 속에서 벌어지는 드라마틱한 생존경쟁 이야기만큼, 게임 바깥으로 나와 다음 게임을 준비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더 드라마틱하다. 한 순간에 피가 튀는 지옥으로 변한 게임 속에서 그들 스스로 투표를 통해 게임을 중단시키고 현실로 돌아온 이들이, 그곳의 삶이 더 지옥이라는 걸 깨닫고 다시 게임 속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는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아무도 모른 채 소각되어 버리는 그 지옥보다 더 지독한 현실이라는 것.

<오징어 게임> 속 게임이 단순하고, 그것도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게임들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이러한 사회비판을 담은 풍자적 관점으로 들여다보면 오히려 통렬함이 느껴진다. 그 순수한 동심의 게임을 피가 철철 흐르는 게임으로 바꾼 건 이 경쟁사회의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징어 게임> 후반에 오면 이렇게 절박한 이들끼리 서로 밟고 올라서야 살 수 있는 살벌한 경쟁을 조장하는 이른바 VIP들(기득권 세력)의 추악한 욕망들이 까발려진다.

이 살벌한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여성들이 성적 착취를 당하거나 이를 오히려 이용하는 모습 역시 그래서 보는 관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단지 자극을 위한 감독의 표현이라고 보면 당연히 '여혐'이 아니냐는 식의 시대착오적 설정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저 세계에서 구역질나는 강자들의 착취와 폭력을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의도로 본다면 달리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주인공 기훈(이정재)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불호에도 똑같이 드리운 시각차다. 즉 기훈 같이 무능력한데다 살기 위해서는 타인을 속이기까지 하는 인물을 감독이 주인공으로 세워 일종의 희망으로 그린 것 아니냐는 시각으로 보면 그 자체가 불편한 시대착오라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황동혁 감독은 기훈을 이 살벌한 세상의 대안적인 히어로로 제시하기보다는 불완전하고 불편하게까지 느껴지는 그저 운 좋은 부조리한 인물로 제시한다. 그는 결코 이 경쟁적 현실의 희망적 존재가 아니다. 대신 경쟁 속에서 자신의 욕망에 휘둘리고 그래서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죄를 저지르면서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는 보통 사람일 뿐.

궁극적으로 이 게임 어디에서도 승자는 없다. 이전에 이 게임 속에서 최후의 1인이 된 자가 그 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면 이 사실은 명백해진다. 이것은 기훈도 마찬가지다. 그가 승마장에서 달리는 말들에 돈을 걸고 제 욕망을 불사른 것처럼, 이들 바깥에는 이른바 VIP들이 저 살벌한 경쟁을 보며 욕망의 쾌감을 얻어간다. 하지만 그들도 승자처럼 보이진 않는다. 엄청난 부자가 되어 모든 걸 가질 수 있게 된 그들은 이제 그런 극단의 쾌감이 아니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으니.

<오징어 게임>은 결코 우리에게 자극의 즐거움을 주는 '데스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불편한 우리네 세계의 부조리한 현실들로 가득 차 있다. 희망 따위가 쉽게 제시되어 있지도 않다. 그래서 호불호가 갈린다. 가뜩이나 경쟁사회의 불공정과 차별, 혐오로 민감한 우리에게, 불편함과 심지어 시대착오적인 현실까지 그대로 들어와 있는 작품이 기분 좋을 리가 있나. 다만 이런 현실을 이토록 통렬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지점은 그 와중에도 어떤 통쾌함을 주는 게 사실이다. 이것이 <오징어 게임>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나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정덕현 칼럼니스트 thekian1@entermedia.co.kr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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