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레카] '손발 노동'의 인간학 / 안영춘

안영춘 입력 2021. 9. 22. 15:06 수정 2021. 9. 22.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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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마르크스가 인간을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존재'라고 한 것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수사만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공통점과 차이점), 인간과 인간(사회)의 관계 차원에서 숙고했고,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존재'라는 답을 내놓았다.

나아가 인간의 노동은 이전 세대와 당대 사회가 성취해놓은 지점에서 행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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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카를 마르크스가 인간을 ‘노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존재’라고 한 것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고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수사만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인간과 자연의 관계(공통점과 차이점), 인간과 인간(사회)의 관계 차원에서 숙고했고, ‘노동을 통해 생산하는 존재’라는 답을 내놓았다. 정치경제학이기 전에 인간학적 혹은 인류학적 탐구 결과라 할 수 있다.(죄르지 마르쿠스 지음, 정창조 옮김, <마르크스는 인간을 어떻게 보았는가?> 참조)

동물의 활동은 주어진 자연적 대상을 선천적인 욕구에 맞춰 점유하고 소비하는 데 국한된다. 물론 동물도 둥지 같은 것을 짓지만, 직접 필요한 것만 생산하고 소비한다. 이와 달리, 인간은 생산과 소비를 통해 새롭게 능력을 발전시키고, 욕구를 만들어낸다. 요컨대 인간의 노동은 인간 자신마저 바꿔놓는다. 가령 인간의 배고픔은 생리적 기제를 넘어, 요리된 음식을 수저를 써서 먹음으로써 충족되는 문화적 기제다. 나아가 인간의 노동은 이전 세대와 당대 사회가 성취해놓은 지점에서 행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활동이다.

노동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에서 정의한 이로 19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아나키스트,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도 빼놓을 수 없다. 프루동은 인간의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건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물려받고 사회 속에서 구체화된 전통과 기술, 생산수단이라고 봤다. 이처럼 노동이 사회에 의지하는 한 능력 차가 권리를 차별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프루동의 인식은 이 한마디로 압축된다. “소유는 도둑질이다.”(조지 우드코크 지음, 하승우 옮김, <프루동 평전> 참조)

“손발 노동은 인도도 하지 않고,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말은 인권과 외교, 인문지리 등 다방면에 걸쳐 참혹한 인식 수준을 드러냈지만, 궁금증을 자극하는 대목도 없지 않다. 첫째, 그는 노동을 손발을 쓰는 것에서 기술(머리)을 쓰는 것으로 발전한 역사적 산물이자, 국가(인도)나 대륙(아프리카) 단위에서 사회적으로 공유된다고 본 것인가? 둘째, 그렇다면 그가 그토록 강조해왔던 ‘자유민주주의’ 앞에서 마르크스나 프루동의 사상은 무죄인가? 끝으로, 도대체 인간에 대한 그의 철학(인간학)은 뭐란 말인가?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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