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동물원] 욕망과 패륜의 화신, 수컷 코끼리물범

정지섭 기자 입력 2021. 9. 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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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에게 돌진하면서 어린 새끼까지 가차없이 깔아뭉개
수컷이 먼저 상륙해 피튀기는 육탄전 벌이며 '서열정리'
물개·물범류중에 가장 커다란 덩치 자랑

영국 일간지 더 가디언이 최근 주간 동물 연재물에 코끼리 물범 얘기를 다루면서 이 짐승과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도 살짝 소개했습니다. 2019년 캘리포니아 동물학회지에 발표된 내용인데요. 핵심은 이렇습니다. 지난 반 세기 동안 특정 북방 코끼리물범 암컷 집단의 행태를 분석해보니 고작 전체 6%에 해당하는 극소수의 암컷이 전체 출산의 55%를 책임졌다는 것입니다. 이 암컷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짝짓기를 통해 임신을 했고, 출산을 해서 육아를 했으며 또한 대체로 무병장수했다는 것입니다. 엄마 본능에 충실한 극소수 ‘수퍼맘’이 앞장서 대를 이어왔다는 것이죠.

2019년 10월 미 캘리포니아주 드레이크스 해변에 상륙한 수컷 코끼리물범이 특유의 부풀어 오른 코를 씰룩이면서 힘을 과시하고 있다. 번식철 암컷보다 먼저 뭍에 올라온 수컷들은 피튀기는 싸움을 통해 서열을 정리한다. /미 국립공원관리청(NPS) 홈페이지

이 수퍼맘, 아니 세상의 모든 암컷 코끼리물범들은 그 노고와 고충을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 어느 짐승보다도 욕망에 눈이 멀고 폭력적인 짐승집단을 파트너로 두고 있기 때문이죠. 바로 수컷 코끼리물범입니다. 기각류(물범·물개·바다사자 등 지느러미발을 가진 해양 육식포유동물의 총칭) 중에서 최고의 덩치와 파워를 자랑하는 코끼리물범. 그러나 이들이 짝을 맺고 2세를 살아가는 방식은 시종일관 잔혹한 본능에 의해 통제되고 작동합니다. ‘짐승만도 못한 짐승’이라고나 할까요.

캘리포니아의 피에드라스 블랑카스 숲 인근 바닷가. 고요한 일상을 누리던 북방 코끼리물범 어미와 새끼가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적의 습격을 받았다. 다름아닌 수컷 코끼리물범이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는 아마도 수컷의 격렬한 몸부림에 깔려 비명횡사 했을 공산이 크다. 이 잔혹한 동족패륜극의 현장을 갈매기들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다. 좀 있으면 맛깔스러운 식사거리가 생길수도 있을 것이라는 본능적 기대감에 사로잡힌 것은 아닐까. /Alamy

코끼리 물범은 남극 주변과 남미 끝자락에 걸쳐 사는 남방형과 미국 캘리포니아 연안에 사는 북방형 두 종류가 있습니다. 수컷 남방 코끼리물범의 몸길이가 6m로 북방 코끼리물범(5m)보다 더 큽니다. 암컷들의 몸집은 몸길이 3~3.5m로 채 절반에 불과합니다. 흔히 자연의 세계를 말할 때 냉혹하면서도 질서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코끼리물범의 생태를 보면 냉혹과 질서를 무질서와 본능과 같은 의미로 봐야할지 혼란스러워집니다. 또한 감정과 절제가 삶의 전반을 통제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남방 코끼리물범의 수컷과 암컷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성별에 따른 몸집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보여준다. /호주 농업수질환경부 남극관리국 홈페이지

그건 여느 포유동물보다도 이들의 한해살이가 이성과 절제, 자비로움과 거리가 먼 듯한 모습으로 전개되거든요. 그래서 짐승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코끼리물범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어마어마한 덩치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컷의 코와 주둥이 부분은 다른 기각류에서 볼 수 없는 기괴한 모습으로 부풀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코는 사슴의 뿔처럼 특히 번식기의 자신의 파워와 욕망을 과시하는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남방형과 북방형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코끼리물범의 한해 생애주기는 번식기와 털갈이시기, 그리고 번식도 털갈이도 하지 않으면서 바다에서 생활하는 시기로 구분됩니다.

대략 1년 중 석달 정도에 해당하는 번식철이 되면 우선 부풀어오른 코를 씰룩이며 수컷들이 뭍에 상륙합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바로 서열정리에 들어갑니다. 기준은 힘이죠. 거대한 몸을 출렁이며 두 괴수가 몸을 맞부딪치는 혈투는 태권도, 스모, 권투, 펜싱, 검도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투기 스포츠를 다 합친것만큼이나 치열하고 살벌합니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혈투를 통해 서열정리가 된 다음 암컷들이 모여듭니다. 번식철 코끼리물범은 수컷끼리의 싸움을 평정한 절대강자가 최대한 많은 숫자의 암컷들을 자신의 세력권 안에 둡니다. 경쟁에서 밀려난 코끼리물범에겐 자신의 유전자를 대물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냉혹한 적자생존의 세계이죠.

번식철 살벌한 세력다툼과 뒤쫓고 피하는 추격전이 전개되는 와중에 코끼리물범이 모처럼 모래사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미 해양대기청(NOAA) 홈페이지

수컷코끼리물범의 냉혹함은 번식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냅니다. 이들에게는 배우자에 대한 예의, 갓 태어난 새끼에 대한 어른으로서의 보호본능 따위를 기대하긴 애저녁에 글렀습니다. 시종일관 욕망의 본능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미 새끼를 낳아서 젖을 물리고 있는 암컷을 향해 거칠게 돌진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 과정에서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어미젖을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나던 새끼가 탱크처럼 돌진한 수컷 코끼리물범의 몸뚱아리에 깔리는 것이죠. 새끼를 거침없이 깔아뭉갠 수컷은 어쩌면 그 새끼의 유전자를 물려준 아비일지도 모릅니다. 패륜적 욕망이 혈육의 본능까지도 거침없이 짓밟는 것이죠.

다음의 동영상은 수컷 코끼리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자비한 존재인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고 있는 수컷이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물범을 완전히 깔아뭉갭니다. 어린 물범의 고통과 절규가 카메라에 생생하게 잡힙니다. 펭귄의 표정은 잔혹하리만치 무심합니다.

새끼를 낳고 정성껏 키우며 어미로서의 본능에 충실히 살아가는 암컷들에게 가장 위험한 적은 북극곰도 돌고래도 아닌 수컷들입니다. 눈에 뵈는 것 없이 거침없이 불도저처럼 돌진하는 이들에게 동족들은 설사 자신의 혈육이라도 그저 걸림돌에 불과할 뿐이죠. 공포와 절망에 질린 암컷의 눈에서 이 종족 생활방식의 비정함이 느껴집니다. 다음의 동영상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각류의 가장 무서운 천적은 북극곰과 범고래입니다. 그런데 코끼리물범은 북극곰과 서식지가 겹치지 않습니다. 설령 야생에서 맞닥뜨린다고 하더라도 덩치와 파워, 그리고 두꺼운 피하지방으로 무장한 코끼리물범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닐 것입니다. 바다사자나 물개를 해안가에서 습격해서 꼬리지느러미로 퉁퉁 튕기며 가지고 놀며 기진맥진하게 한 뒤 잡아먹는 식습관으로 악명높은 범고래에게조차 이들을 녹록치 않은 상대일 것입니다. 오히려 코끼리물범의 가장 무서운 적은 어린시절 맞닥뜨리는 아버지뻘 수컷들이죠. 일생의 상당부분을 먼바다에서 보내고 남극처럼 엄혹한 곳에서 살아가기 위한 적자생존의 법칙이라고 이해해야만 하는 걸까요. 대자연의 법칙은 공감과 이해가 어려운 초고차방정식으로 와닿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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