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촛불시위까지 함께.. 100호 넘은 광화문 글판에 숨은 이야기

허유진 기자 2021. 9. 2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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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부터 31년째 "서울과 함께 했어요"
초반엔 인쇄만 한주, 이젠 이틀이면 끝
1991년 첫번째 광화문 글판. 당시 문안은 계몽적인 메시지를 담은 표어 형태였다. /교보생명

서울 종로구 교보생명 본사 외벽에 내걸린 대형 글판인 광화문 글판이 100회를 맞았다. 광화문 글판은 30자 남짓 분량의 짧지만 희망과 사랑을 전하는 메시지로 채워진다. 교보생명 창립자인 고 신용호 명예회장의 제안으로 1991년 1월부터 시작돼 올해 31주년을 맞았다.

광화문 글판은 서울 한복판 광화문역 사거리에서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새천년의 기대에 부푼 2000년 새해 전야, 태평로가 붉은 인파로 물든 2002년 한일 월드컵과 여러 차례의 촛불 시위 등 서울 시민의 곡절을 함께 지켰다. 한국의 역사와 긴 시간을 함께 한 이 글판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31주년을 맞은 광화문 글판의 역사를 돌아봤다.

◇초창기 한주 걸리던 인쇄, 이젠 이틀이면 OK

시대에 따라 글판 제작 기술도 변화를 겪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가로 20m, 세로 8m 대형 글판 인쇄에만 일주일이 걸렸다. 일정한 색감을 위해 기계 한 대로 글판을 한번에 찍어내야하는데 대형 인쇄 기술을 보유한 곳이 많지 않아 인쇄소 계약도 쉽지 않았다. 현재는 대형 인쇄를 진행하는 곳이 많아 길어도 이틀이면 인쇄가 가능하다.

건물에 거는 작업도 만만치 않다. 1톤 트럭으로 글판을 운반해 5명이 크레인을 타고 건물에 올라가서 인쇄물을 펼쳐서 고정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2008년에는 입체적 디자인 표현을 위해 실제 책끈을 글판에 부착했는데 작업 당시 책끈이 바람에 자주 날려 고정하는데 인부들이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BTS(방탄소년단)가 쓴 문구(’춤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허락은 필요 없어’)를 적은 100번째 광화문 글판처럼 특별한 글판은 프린트해서 거는 대신 건물 자체에 글판을 감는 래핑(wrapping) 방식을 쓰기도 한다. 이번 문구에도 PVC 재질 스티커를 썼다. 교보생명 관계자는 “예전엔 글판으로 건물을 래핑하면 해당층 직원들은 창문에 빛이 안 들어와 한밤중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해야 했다. 최근엔 기술이 좋아져 100번째 글판은 외부에선 디자인이 보이지만 실내에선 창밖이 보이는 소재가 쓰였다”라고 말했다.

사진/ 2021년 8월 3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외벽에 100번째 광화문글판 '춤 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허락은 필요 없어'가 래핑되어 있다. 이 문안은 글로벌 아티스트 방탄소년단(BTS)이 작성했다. / 오종찬 기자

◇1호 문구는 ‘격언’, 이제는 디자인 예술

광화문 글판이 언제나 지금처럼 예쁘거나 화려하진 않았다. 초창기엔 표어나 다름 없이, 딱딱한 문구와 서체가 걸렸다. 1호 문구는 ‘우리 모두 함께 뭉쳐 경제 활력 다시 찾자’였는데 그 아래 아예 ‘1991년 1월~1991년 12월 격언’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른쪽 한귀퉁이엔 ‘도약’이라는 단어가 한자로 ‘跳躍’이라고 새겨졌다.

시대에 맞춰 스타일은 변했다. 2005년 디자인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광화문 글판의 상징처럼 굳어진 캘리그라피(손글씨 예술)를 도입했다. 옥외 광고물에 캘리그라피를 사용한 것은 광화문 글판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박병철, 다자란소년과 같은 유명 캘리그래퍼의 작품과 판화가 이철수의 글씨 등 다양한 디자인이 선정됐다.

문안이 정해지고 나면 최소 30개의 디자인 후보안이 나온다. 몇 차례 수정을 거쳐 3개 정도 이미지가 ‘최종 후보’에 오르고 내부 임직원 선호도 조사를 통해 최종 글판 디자인이 결정된다. 글판의 배경이 되는 이미지는 창작도 하지만 기존 작품을 쓰는 경우도 있다. 2009년 봄편 아싸의 하이쿠에는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최우수 그림책인 류재수 작가의 ‘노란 우산’ 그림이 들어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20년 8월 31일 광화문글판 3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광화문 글판. '시민과 함께하는 문안 공모전'에서 선정된 이 문안은 1986년 포크밴드 '시인과 촌장'이 발표한 노래 '풍경'에서 가져왔다. 글판 디자인은 대학생 디자인 공모전에서 수상한 민주영씨의 작품. /교보생명

◇“떠나라 낯선 곳으로” 글판 본 청와대 행정관 ‘사표’

글판의 핵심인 문안의 경우 초기에는 계몽적인 표어가 대부분이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부터 지금의 감성적인 어조로 변화했다. 주기를 정하지 않고 갈아온 문안은 2003년부터 계절별로 새로 걸고 있다. 문안 선정은 시민 위원들로 구성된 ‘광화문 글판 문안 선정위원회’가 맡는다. 위원회는 2000년부터 개최돼 지금 11기 위원이 일하고 있다. 위원들은 짧게는 1년, 길게는 4년까지 글판을 심사한다.

1998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생명 본사에 걸린 광화문 글판. 문안은 고은 시인의 '낯선 곳으로'에서 따왔다. /교보생명

이런 절차를 걸쳐 공자, 헤르만 헤세, 파블로 네루다, 서경주, 도종환, 김용택 등 70명에 이르는 동서고금의 현인과 문학인들의 작품이 글판으로 재탄생했다. 시대가 바뀌며 현인·문학인 뿐만 아니라 BTS 등 대중문화인과 협업도 늘었다.

광화문글판에 가장 많은 글을 올린 이는 글판에 다섯 번 인용된 고은 시인이다. 1998년 ‘낯선 곳’ 중 ‘떠나라 낯선 곳으로/그대 하루하루의/낡은 반복으로부터’ 문구가 올랐는데,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실 총괄 행정관이었던 김탄일씨가 이를 보고는 “하고싶었던 일을 시작하겠다”며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다.(그는 사업을 시작했다.) 각각 네 차례 인용된 정한종·정호승 시인이 인용 횟수 공동 2위다.

시민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시(교보생명 온라인 투표 기준)로는 2012년 봄편 글판에 인용된 나태주 시인의 ‘풀꽃’(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이 꼽힌다. 2011년 여름 광화문글판을 장식했던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가 인기 투표 결과 2위였다.

2012년 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에 걸린 광화문 글판. 문안은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서 따왔다. 해당 글판은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광화문글판으로도 뽑혔다. /교보생명
2011년 여름 광화문글판을 장식했던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 중 일부.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란 이 문구는 인기 투표 결과 2위였다. /교보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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