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단속? 앗, 속았다..경찰관부터 경찰차까지 '도로 위의 가짜들'

박수혁 2021. 9. 2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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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곳곳 교통사고 예방 목적으로 설치
일부 운전자들 "속이는 행위 불쾌해"
교수 "'캥거루 운전' 유발로 다중추돌 우려"
도로공사 쪽 "운전자 과실 사고 감소 추세"
경찰청 "지역 자체 판단..추후 존치 여부 결정"
한국도로공사 강원지역본부가 강원경찰청과 협의해 강원지역 고속도로 6곳에 설치한 모형 경찰차 모습. 경찰차 뒷부분만 있는 이 모형은 3차원(3D)으로 제작해 기존 평면 형태의 모형 경찰차에 견주어 더욱 정교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도로공사 제공

“번쩍번쩍 경광등까지 달려서 진짜 경찰차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옆 모습을 보고 아직도 국가가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불쾌감이 들었습니다.”

강원도 춘천에 사는 심아무개(52)씨는 최근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다 황당한 경험을 했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홍천에서 횡성 방향으로 달리는 데 저 멀리 갓길에서 경광등이 번쩍였다. 하얀색 바탕에 파란색이 섞여 있는 경찰차가 비상주차구역에 서 있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고 속도 계기판을 힐끔거렸는데 시속 100㎞가 넘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지나치려 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곁눈질로 봤더니 경찰차의 뒷부분만 있고, 앞부분이 없는 것이었다.

심씨는 처음엔 ‘어? 뭐지?’라는 생각에 어안이 벙벙했다. 순간적으로 ‘경찰차가 사고를 당해서 앞부분이 훼손됐나?’라는 생각마저 했다. 한참 뒤에야 ‘가짜 경찰차’에 속았다는 걸 눈치챘다. 그는 “과속운전을 방지할 목적일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요즘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경찰이 국민을 속인다는 생각에 온종일 불쾌했다”고 말했다.

한국도로공사가 경찰과 협의해 경부선에 설치한 모형 경찰차와 경찰관 모습. 한국도로공사 제공

전국에 ‘가짜 경찰차’ 우후죽순

전국 도로 곳곳에 교통사고를 예방한다는 명분으로 ‘가짜 경찰차’가 우후죽순으로 설치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단순 선간판 형태에 머물지 않고 3차원(3D) 모형까지 등장하는 등 최대한 실물과 유사한 모형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7~8월 한국도로공사 강원지역본부가 강원경찰청과 협의해 강원지역 고속도로 6곳에 설치한 모형 경찰차가 대표적이다. 이 모형은 실제 경찰차와 구별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3차원(3D)으로 정교하게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이전까지의 모형 경찰차는 보통 패널에 경찰차 사진을 붙인 형태의 평면으로 제작됐다.

하지만 강원도에 설치된 이 모형 경찰차는 실제 경찰차와 똑같이 보이기 위해 플라스틱을 녹여 실물 크기의 입체 모형을 만든 뒤에 색까지 정교하게 칠했다. 경광등은 물론이고, 파란색으로 쓴 ‘POLICE’ 글자와 까만색 자동차 바퀴의 느낌까지 그대로 살렸다. 다만, 도로에서 주행하는 차량이 정차한 경찰차의 뒷면만 볼 수 있는 점을 고려해 앞부분은 빼고 뒷부분만 제작했다. 실물과 똑같은 이 모형 경찰차 1대 제작에 필요한 예산만 1000만원이다. 모두 더해 6000만원이 사용된 셈이다.

한국도로공사 관계자는 “과속 사고 예방을 위해 기관별로 사고 취약지점을 자체적으로 선정한 뒤 경찰과 협의해 설치했다. 다른 지역은 평면 형태여서 효과가 다소 떨어지는 것 같아 3차원 방식으로 제작했다. 모형 경찰차를 설치한 뒤 별도로 효과를 분석하지는 않았지만, 운전자 과실로 인한 사고 건수와 사망자 수는 감소 추세에 있다”고 말했다.

충남 예산경찰서가 2019년 연두색 형광 점퍼를 입은 경찰관의 실제 모습을 한 모형 경찰관인 ‘경찰 등신대’를 도로변 등 10곳에 설치했다. 예산경찰서 제공

‘경찰 등신대’까지 등장

강원도뿐 아니라 경남과 경기도 등에서도 최근 몇 년 사이 잇따라 모형 순찰차가 도로에 설치되고 있다. 경남의 김해중부경찰서는 2019년 김해시와 협업해 예산 600만원을 들여 공원과 골목길 등 3곳에 방범용 모형 순찰차를 설치했다. 김해중부경찰서 관계자는 “보통 모형 경찰차가 안전운행을 유도하기 위해 도로 등에 설치되는 것에 착안해 우리 경찰서는 범죄 노출 우려가 있는 골목길과 공원 등 인적이 드물고 취약한 곳에 설치했다. 현재까지 추가 설치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경기도 연천경찰서도 지난해 3월 교통사고를 예방을 위해 연천군과 협업해 순찰차 모형의 경광등 5개를 만들어 3곳에 설치했다. 한국도로공사 자료를 보면, 이런 식으로 경찰과 협의해 전국 고속도로에 설치한 모형 경찰차만 107개(지난해 말 기준)에 이른다.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와 지방도 등에 각 시·군 경찰서가 지자체와 협의해 설치한 모형 경찰차는 현황 파악조차 되지 않을 정도다.

모형 경찰차에 이어 심지어 충남에서는 ‘경찰 등신대’란 이름의 모형 경찰관까지 등장했다. ‘등신대’는 실제 사람과 같은 크기의 형상을 일컫는 말로 흔히 통신사 광고 모델로 만든 등신대 등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예산경찰서는 2019년 연두색 형광 점퍼를 입은 경찰관의 실제 모습으로 등신대를 만들어 도로변 등 교통사고가 자주 나는 10곳에 설치했다. 예산경찰서 관계자는 “과속을 하거나 운전에 집중하지 않은 주민도 실제 경찰관인 줄 알고 깜짝 놀라 서행 운전을 하게 돼 교통사고 예방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또 교통안전 활동에 배치할 인력을 줄일 수 있어 다른 긴급 상황 발생 시 경찰관을 투입할 여유가 생긴다”고 말했다.

경기도 연천경찰서가 만들어 지역에 설치한 순찰차 모형의 경광등 모습. 연천경찰서 제공

‘뻥카’ 2400여대 폐기하고 또다시

하지만 이런 경찰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모형 경찰관과 경찰차 설치가 ‘근시안적인 발상’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포항에 사는 박창원(65) 전 청하중학교 교장은 “일부 교통사고 예방 효과가 있다고 해도 국민에게 목적만 좋으면 수단은 정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염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모형 경찰차와 경찰관 등은 모두 가짜다. 국가가 대놓고 국민을 속이는 것은 문제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정직’의 가치 훼손과 거짓·범죄 증가로 이어져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과거에도 경찰은 2000년대 주요 도로에 과속운전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가짜 무인단속 카메라(일명 뻥카)를 다수 설치한 적이 있다. 이후 국정감사 등에서 ‘단속 카메라 5대 가운데 1대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과속 단속 카메라를 설치·운영할 권한이 없는 한국도로공사가 가짜 무인 과속 단속 카메라를 임의로 설치한 사실도 드러나 비판을 받았다. 비난 여론이 일자 2005년 경찰은 가짜 장비였던 2400여대를 폐기한 바 있다. 당시 경찰은 “법 집행 기관인 경찰이 국민을 속이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민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짜 카메라가 가짜 경찰차 등으로 변신해 도로 곳곳에 설치되고 있는 셈이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가짜 경찰차를 보고 운전자가 놀라면 사고의 위험도가 높아진다. 특히 가짜 경찰차와 경찰관은 카메라 앞에서만 급감속하는 이른바 ‘캥거루 운전’을 유발할 수 있는데 이때 뒤차와의 안전거리가 확보되지 않다면 다중 추돌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경찰청 관계자는 “모형 경찰차를 설치하라고 지침을 내린 적이 없다.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해 설치한 것 같다. 따라서 전국에 얼마나 많은 모형 경찰차 등이 설치돼 있는지 파악하진 못했다. 먼저 전국 설치 현황을 파악한 뒤 효과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존치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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