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읽는 최영미의 어떤 시] 섬진강 12: 아버님의 마을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1. 9. 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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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12: 아버님의 마을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닭이 우는구나.

우리가 여기 나서 여기 사는 것

무엇무엇 때문도 아니구나.

시절이 바뀔 때마다

큰 소리 떵떵 치던

면장도 지서장도 중대장도 교장도 조합장도 평통위원도

별것이 아니구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동경도 서울도 또 어디도

시도 철학도 길가에 개똥이구나.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두런두런 오손도손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더라.

그이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들은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토착화되지 않을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하며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이는구나.

-김용택(金龍澤 1948∼)

*

젊은 날, 시인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구호라니. 정말 호쾌한 한방 아닌가. 김용택 선생님 댁을 찾아가 시인의 노모가 지은 따뜻한 밥을 얻어먹은 적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그분들 덕이다.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우리가 함께 했던 마지막 추석이 언제였더라? 언제인지 가뭇한 그날, 아버님은 밤을 까고 어머님은 차례상을 차렸다. 접시들을 나르는 시늉을 하고 식탁에 앉으려다 나는 보았다. 먹기에 몰두한 늙은 부모의 뒷모습. 애처롭고 숭고했던….

아버지의 묘지에 다녀온 지 한참 되었다. 멀고 차가 없다는 핑계로 성묘를 게을리했다. 살아있는 어머니, 요양병원에 있는 당신을 몇 달에 한번 유리벽 너머로 볼 때마다 엄마가 나를 기억할까? 걱정이 앞선다. “나 누구야?” “누구긴…내 딸이지” 자식에 대한 서운함을 내색하지 않는 엄마. 모든 것을 자식들에게 내어주고 늙어 오그라든 어미의 손을 언제 다시 잡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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