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 타임이 필요해
숨이 턱턱 막히던 밤공기가 살짝 서늘해진 요즘이다. 가을을 재촉도 하고 마중도 할 겸 경남 고성 거류산으로 떠났다.
경남 고성 거류산 산행 계획을 잡고 산에 관해 사전에 조사했더니 재미있는 전설을 발견했다. 옛날 어떤 할머니가 저녁밥을 짓다가 밖에 나와 보니 산이 하나 걸어가고 있었다. “게 섰거라!” 하고 소리치자 산이 지금의 거류산 자리에 멈췄다는 전설이다. 이렇듯 산마다 가지고 있는 전설은 어릴 적 읽은 전래동화만큼 재미있다. 또 산을 직접 찾았을 때 문득문득 전설이 떠오르며 더욱더 산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거류산은 정상에 견고하게 쌓인 거류산성과 돌탑으로 유명하지만 산성을 지나면서 조망되는 당동만과 끝없이 펼쳐지는 다도해도 으뜸이다. 한국의 미니 마터호른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마법 같이 빠른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거류산 산행길 덕분에 어느새 정상이 코앞이다. 정상을 100m 정도 남겨두고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둘러봐도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발걸음을 이어가자 또다시 나뭇잎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다. 재빠르게 옆을 휙 돌아보았더니 아슬아슬한 바위에 염소가 무슨 호들갑이냐는 듯 질겅질겅 풀을 씹으며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좀처럼 만나기 힘든 동물을 만나니 신기하기도 했는데 문득 뿔로 달려들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염소에게 “알겠어~ 미안, 계속 풀 먹어라” 하면서 태연한 척하며 후다닥 자리를 이동했다. 다행히 염소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바쁜 요즘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멍 때리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거류산 정상에서 잠시 산 멍과 바다 멍을 즐기기로 했다. 깎아 놓은 듯한 바위에 앉아 키 작은 나무들 옆에 배낭을 두고 파노라마 같은 바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간 복잡했던 마음과 머리가 이따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듯했다.
정상에서 멍 타임을 즐긴 후 오늘의 야영지인 너른 바위를 찾아 이동했다. 여기서 잠깐! 백패킹 초보자를 위해 텐트 선택법을 공유한다. 백패킹 입문자 중 텐트 선택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더블 월 텐트를 추천한다. 그중에서도 자립형의 이너텐트와 플라이 조합으로 이루어진 더블 월의 텐트를 선택하면 다양한 환경에서 잘 활용할 수 있다.
해가 완벽하게 저문 뒤, 자리로 돌아와 오늘 하루 경치와 어우러지는 우리 모습을 보며 완벽한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은 하늘이 흐린 탓에 별을 만날 수 가 없었다. 그래서 준비해간 작은 전구로 그 아름다움을 대신했다.
일상에서는 10분 일찍 일어나기가 마라톤보다 힘든데 문밖에만 나오면 자동으로 일출 시간에 맞춰 눈이 떠진다. 오늘도 어김없이 하늘을 비집고 새어 나오는 작은 빛을 마주하며 텐트를 박차고 나왔다. 일출을 기다리는 이 시간,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는 아빠의 마음이 이러할까? 그 마음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비슷하게 긴장되고 떨리지만 설레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을 헤아려주듯 해가 당동만을 붉게 물들이며 솟아올랐다. 활기찬 일만 생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해님도 하루를 시작했으니 우리도 하루를 시작한다. 잠자리를 열심히 정리하고 있는데 우다닥 소리가 나더니 어제 만났던 염소가 친구에 사촌 동생들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우리도 염소가 신기하지만 염소도 우리가 신기했던지 풀을 뜯다가도 와서 목을 빼고 우리를 쳐다보고 또 이동하다가도 빤히 쳐다보고 우리를 제대로 구경하는 듯했다. 아침 식사를 방해한 게 미안해 빛의 속도로 야영지를 정리하고 흔적 없이 자리를 떠났다. “오늘도 잘 머물렀다 갑니다.”
여기서 잠깐 여름과 가을철 산행의 필수 아이템을 소개한다. 이맘때는 목이 긴 중등산화, 뱀으로부터 최대한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긴 바지와 긴 소매 상의, 벌레 기피제 등을 휴대하는 게 좋다. 산에서 물리는 벌레는 일상의 벌레들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에 맨살을 드러내고 숲을 지나왔다간 며칠간 고생할 수 있다.
김혜연 / shin025@outdoor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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