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기억이 재현하는 삶의 실제..김원일 '마당 깊은 집'

유동엽 2021. 9. 1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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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만성을 고지하는 은유
김원일의 장편소설 <마당 깊은 집>은 한국전쟁 직후 우리 삶의 실제를 보여주는 자전적 서사이다. 이데올로기의 남용과 그로 인한 가족의 붕괴, 이어지는 가난과 결핍, 고통과 상처는 그 실제의 구체적 목록이다. 물론 <마당 깊은 집>은 이러한 전쟁의 폭력성과 후유증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정치적 합법성을 가장한 비열한 정치 테러이며 문명과 이데올로기의 이름을 내건 야만의 행위라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작가의 육성으로 내보내는 법이 없다. 대신에 소설은 작가 김원일의 기억이 재구하는 마당이 깊은 집과 그곳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의 비루한 일상을 통해 전후의 우울하고 참담한 분위기를 총체적으로 재현한다. 이런 측면에서 대구 장관동에 위치한 “마당 깊은 집”은 전후 우리 사회의 집약적 실체이자, 그 자체로 시대의 기만성을 고지하는 하나의 거대한 은유라고 할 만하다.

■"애새끼 넷을 먹이고 공부시킬라고..."
그 거대한 은유의 한복판에 어머니가 살고 있다. 어머니는 이데올로기의 신기루를 좇아 월북한 남편으로 인해 과수댁이 된 강직한 여장부이다. 그녀는 “애새끼 넷을 먹이고 공부시킬라고 뼈마디가 내려앉도록 새벽부터 자정까지 손 재워 놓을 틈 없게 재봉틀을 돌리”(이하 판본은 <마당 깊은 집>, 문학과지성사, 2009) 며 가난과 고통으로 점철된 전후의 비참한 삶을 위태롭게 살아간다. 아니, 견뎌낸다. 그런 어머니가 “배를 가장 많이 곯았던 시절이요 가장 더러운 세월”을 견디고 극복해가는 방식 중의 한 가지는 어린 화자이자 맏아들인 길남이를 가혹하리만치 엄하게 훈육하는 일이다. 소설의 곳곳에 산포된 어머니의 혹독한 매질과 이로 인해 어머니의 존재를 두려워하는 어린 길남이의 강박적 심리상태는 “애비 읎는 이 집안의 장자”에 대한 훈육의 정도를 가늠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동시에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가부장의식을 엿보게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은 어머니가 나를 키운 이야기”라는 작가의 나직한 고백이 묵직한 음성으로 들려오는 것도 바로 이 근방이다. 소년 길남이는 전쟁의 참혹성 이전에 어머니의 매질을, 맹목적 이데올로기의 횡포보다는 장자를 향한 모친의 과잉 기대심리를 우선적으로 체현한 것이다. 자칫 공허한 이념과 사상의 문제가 개입될 수도 있었던 이 소설이 실존의 감각을 넉넉하게 확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소년 길남이에게 1950년대의 ‘더러운 세월’은 이념 선택과 아비 부재의 차원을 넘어 생존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전쟁의 그늘에 있는 여섯 가족
한편 중심 서사가 부재하는 이 소설의 한 축이 화자의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기억으로 구조되었다면, 나머지는 “마당 깊은 집”에 동거하는 인물들의 고단하고 각박한 삶과 맞물려 전개된다. “마당깊은 집”에는 도합 여섯 가구가 모여 산다. 정확하게는 위채의 주인댁을 제외하고 다섯 가구가 아래채와 바깥채에 세 들어 산다. 먼저 아래채 첫째 방에는 “경기도 연백군에서 피난 나온 경기댁 가족”이 기거한다. 경기댁 가족은 길남이네 경우처럼 아버지가 부재하는데, 나중에 딸 미선이가 미군과 결혼하여 도미한다. 둘째 방은 “퇴역장교 상이군인 가족”이 차지했다. 역시 세 식구이다. 특이점은 세를 사는 가족 가운데에서는 유일하게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아버지의 신체 일부가 전쟁으로 인해 훼손당했다는 측면에서는 이른바 ‘부권상실’의 국면으로 간주된다. 다음으로 평양댁 가족은 셋째 방에 산다. 네 식구이고,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두고 있다. 요주의 인물은 정태 씨다. 작품의 말미에서 그는 월북 미수의 사상범으로 감방 생활을 지속한다. 남성 가장이 없기는 바깥채의 김천댁도 마찬가지다. 원래 김천댁은 정태 씨와 함께 월북을 감행했으나, 최종에는 그녀 가족만 성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외에 위채에는 여덟 식구가 산다. ‘주인댁’의 명성에 걸맞은 나름의 풍족한 생활을 시종일관 영위한다. 󰡔

■전쟁 체험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
<마당 깊은 집>은 중심 서사가 없다고 했거니와, 이는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 여섯 가족 구성원들의 개연성 있는 에피소드와 잡다한 일상의 흐름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에서 재차 확인된다. 변소 이야기를 비롯한 단편적 사건들과 이들 삶의 분주한 행보만으로는 여전히 장편소설이 요구하는 거대한 서사적 동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전쟁체험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기억이 재생하는 실질적 삶의 감각으로 발군의 현장성을 일찌감치 확보했기 때문이다. 가난과 고통, 상처와 강박으로 얼룩진 작가의 실제 경험이 특유의 소설적 상상력과 맞물려서 전후의 사실적 삶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적극적으로 도모하기 때문이다. 가령, 길남의 동생 길수가 가난 탓에 약도 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대목의 비애감 확산은 작가의 경험적 상상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또한 아비가 부재하는 전후의 실상을 아래채와 바깥채 가구 모두에게 적용하며 치밀한 소설구성의 묘미를 선보인 장면과, 정태 씨의 월북사건과 수감 소식을 담담하게 전달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해소되지 않은 시대 모순을 환기하는 대목은 객관적 현실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 없이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여기에 동일인물의 시선 교차, 다시 말해 어린 길남이와 어른 길남이의 이중화자 설정은 서사의 전개과정에서 균형감각의 유지를 보장한다.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이 가난에 대한 실감 나는 이야기이자, 자전형의 가족 서사이며, 분단 직후의 성장소설로 자주 호명되는 원인도 여기서 연원한다. 더하여 이 작품이 독자들과 자기연민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장편소설의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문학사적 평가도 이 지점에서 견인된다. 1988년에 발표된 이 소설,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가장 확실한 정서적 알리바이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천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유동엽 기자 (imher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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