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코는 들리고, 날개는 분리, 몸체는 드러내고, 조종실은 민낯으로..
항공기 안전운항·30년 사용 뒤에 이런 노력이
보잉737 중정비에 정비사 50명이 15일 2교대
헬기·전투기 정비·경비행기 성능 개조도
지난 3일 오후 경남 사천시 사천공항 옆에 위치한 한국항공서비스(KAEMS·이하 캠스) 민항기 정비동. ‘제주항공’ 로고가 그려진 보잉737 항공기가 온몸이 풀어헤쳐진 상태로 정비를 받고 있다. 항공기 앞쪽 코 모양 부분은 위쪽으로 들려져 레이더 장비가 통째로 노출돼 있고, 본체에서 분리된 양쪽 날개는 연료 탱크와 각종 센서 연결 케이블 등 속살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조종실에선 버튼과 계기판으로 구성된 각종 계기 장비들이 민낯 상태로 테스트를 받고 있다. 객실은 내부 좌석과 인테리어가 완전 제거돼, 중간에 화장실과 기내식 조리대가 남아있는 게 이 비행기가 여객용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 중정비 받는 항공기 모습, 처연하기까지 안내를 맡은 고이근 캠스 사업실 상무는 일정 시간(기간) 비행 뒤에는 반드시 받게돼 있는 ‘기체 중정비’가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 기간은 2주 정도다. 항공사의 정비 계획에 따라 비행기의 ‘오장육부’를 다 들어내거나 드러낸 상태로 부실해졌거나 사용 기한이 지난 부품이 사용되고 있는지 등을 살핀다. 각종 전자장치에 오차가 생기지는 않았는지 등을 점검하는 일도 포함된다. 닳거나 훼손된 인테리어 등을 교체하고 틈새에 낀 먼지나 때도 제거한다.
고 상무는 “기체 중정비를 마치면 거의 새 비행기로 거듭난다. 중정비를 받으려면 운항을 중지해야 해 항공사 쪽에서는 항공기 정비 과정이 모두 비용이다. 꼼꼼하게 하되 서둘러야 한다는 얘기다. 보잉737 기종의 경우, 50여명의 정비사가 2교대로 투입돼 하루 16시간씩 정비를 진행한다”고 말했다. 정비를 끝낸 항공기는 넓은 도로로 연결돼 있는 옆 사천공항으로 끌고나가 항공사 쪽 조종사들의 정비 결과에 대한 지상 데스트 절차를 거쳐 항공사에 인계된다.
옆에는 군용기·회전익 정비동이 따로 설치돼 운용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하 카이)이 개발한 국산 헬기 ‘수리온’과 에어버스 기종 등 해병대·해양경찰·중앙119 등의 로고가 그려진 중대형 헬리콥터 5대가 나란히 정비를 받고 있다. 헬기들 역시 온몸이 풀어헤처져 있다. 상단의 엔진이 분리된 것도 있다. 고 상무는 “헬기 중정비는 정비사 5~6명씩이 투입돼 7~8주 동안 작업한다”고 설명했다. 중간에 처진 칸막이를 지나니 국산 전투기(F-16)가 역시 속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정비를 받고 있다. 바로 옆에선 뒷정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해군초계기(P-3CK)가 중정비를 마치고 막 떠난 자리란다.
항공정비 현장이다. 항공정비는 조종사 훈련과 더불어 운항 안전을 좌우한다. 이 때문에 비행기는 이륙 준비 때마다 ‘운항정비’를 받고, 일정 시간(기간) 운항 뒤에는 정비동에 입고시켜 ‘중정비’를 받아야 한다. 고 상무는 “민항기 기준으로 항공기는 제작 뒤 30~40년 가량 운항되는데, 정비가 안전운항과 항공기 사용 연한을 좌우한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비용을 따져보면, 운항 기간 정비로 발생하는 비용이 구입가의 3~4배에 이른다”며 “항공기 안전운항 및 성능 유지·개조 관련 산업을 포괄하는 항공엠아르오(MRO)산업이 주목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 치열해지는 항공정비 물량 쟁탈전 항공정비는 항공기 수리·분해정비·개조와 부품 조달 등을 포괄한다. 정비 내용에 따라 운항정비, 기체중정비, 엔진정비, 부품정비로 나뉜다. 항공정비를 포괄적이고 산업적인 개념으로 부르는 게 ‘항공 엠아르오(MRO)’다. 세계적으로 항공엠아르오는 성장 잠재력이 크고, 부가가치가 높으며, 양질의 일자리 창출 기회가 큰 산업으로 꼽힌다. 항공기별로 반복적인 정비 수요가 발생해 매출이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국제인증(미국 FAA·유럽 EASA 등) 등 진입장벽이 높은 것도 이 산업의 특징이다. 국적 항공사의 안전운항 경쟁력 향상은 물론 항공·우주산업, 항공기 부품 산업, 항공기 개조(튜닝) 산업 등을 키우는 데 필요한 기술 축적 기회로 삼아지기도 한다. 국가 차원 내지 대형 항공사와 항공기 제작사 등이 합작사를 만들어 물량 쟁탈전을 벌이는 까닭이다.
세계 항공엠아르오 시장조사 업체 올리버 와이만의 전망에 따르면, 전 세계 상업용 항공기는 2019년 2만7492대에서 2029년 3만9175대로 늘고, 같은 기간 세계 항공엠아르오 시장은 819억달러에서 1159억달러로 커진다. 기술 장벽이 높고 정비 부가가치가 큰 엔진정비와 부품정비 쪽이 시장 성장을 이끈다. 미국과 독일은 항공기 제작 기술, 싱가포르는 전문업체 설립과 항공기 제작사 유치, 중국은 자체 수요와 낮은 인건비 등을 내세워 정비물량 확보에 나서는 중이다. 독일 항공엠아르오 전문업체 루프트한자 테크닉은 항공기 정비인력 만도 2만6천명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선 항공정비가 산업으로 크지 못했다. 안전운항 지원 서비스 정도만 인식돼와서다. 관련 정책도 항공사들의 항공기 정비 불편과 비용 부담을 해소하는 차원에서만 접근했다. 2019년 기준 국적 항공사들의 총정비비 2조7621억원 가운데 46%에 이르는 1조2580억원이 국외업체로 흘러간 배경이다. 상대적으로 비싼 엔진정비는 1조4518억원 가운데 7960억원(55%)이, 부품정비는 5566억원 가운데 3293억원(59%)이 국외에 위탁됐다.
현재 항공정비 국내 업체는 약 40곳이다. 하지만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자사 항공기 일부를 자체 정비하고, 운항정비 수준에 머무는 저비용항공사(LCC), 경비행기·헬기 운항정비와 객실 좌석 인테리어 수리 등을 하는 업체 등을 제외하면, 민항기 정비까지 가능한 항공엠아르오 전문업체는 자본금 1350억원 규모로 2018년 설립된 캠스와 인천공항에서 외국 항공사 상대로 화물기 운항정비와 보잉 737 중정비를 해주고 있는 샤프테크닉스케어(STK) 2곳에 그친다.
■국내 항공정비는 아직도 ‘서비스’ 수준 캠스는 항공엠아르오산업 육성이 아닌, 저비용항공사들의 항공기 정비 애로 해소 차원에서 정부 주도로 만들어졌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업계 관계자는 “2000년대 들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저비용항공사들이 항공기 정비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국토부가 카이와 한국공항공사 등을 앞세워 캠스를 설립했다”고 말했다. 현재 캠스 지분은 카이(66.4%)·한국공항공사(19.9%)·비엔케이(BNK)금융그룹(9.0%)과 제주항공을 비롯한 저비용항공사 및 항공기 제작사 4곳(4.7%)이 나눠갖고 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저비용항공사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항공기 제작사나 미국·유럽연합·싱가포르 등의 전문업체에 맡기려니 비용이 비싸고, 대한항공은 정비 조직과 인력을 자사 항공기에 맞춰 운용해 여력이 없고, 어쩌겠냐. 대만과 중국은 물론 인도네시아와 몽고 정비업체에 맡기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캠스는 사업영역은 항공기 기체중정비, 비행기 도장(도색), 부품 정비, 항공기 개조 및 성능 개량 등이다. 캠스는 제주항공·티웨이항공·이스트항공의 보잉 737·에어버스 320 기종과 하이에어 항공기, 국산 전투기와 해군초계기, 육군·해병대·공공기관 운용 헬기, 주한 미군 전투기(F-16) 등을 정비한다.
속을 들여다보면 ‘차려진 밥상(국내 항공사 물량)도 못먹고 있는’ 모습이다. 저비용항공사(LCC)들이 줄줄이 생겨나고, 우리나라 군과 주한·주일 미군이 항공기 정비를 민간에 위탁하는 사례가 느는 등 국내 항공정비 수요는 빠르게 늘고 있다. 경찰청과 소방청 같은 공공기관의 헬기 도입과 기업들의 전용 항공기 및 헬기 보유도 빠르게 늘고 있다.
이에 비해 지난 8월 기준 캠스의 정비인력은 175명이고, 올해 매출 목표는 210억원에 그친다. 독일·프랑스·이스라엘 등의 항공엠아르오 전문업체 정비인력이 1만4천~2만6천여명에 이르고, 대한항공의 정비인력이 2천여명에 이르는 것과 대비된다. 이런 상태로는 항공사들이 물량을 맡겨도 소화해내기 어렵다.
이 업체 관계자는 “민항기 정비동에선 보잉737 4대를 동시에 정비할 수 있다. 하지만 출범 3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4대가 들어찬 적이 없다. 한대뿐일 때가 많고, 가끔 2대가 들어온다. 국내 항공정비 물량이 국외에 위탁되는 비중이 높다 보니 정비사를 마냥 늘릴 수도 없다”고 말했다.
■ 정부, 드디어 항공MRO산업 육성 나서 정부도 서서히 항공엠아르오를 산업으로 보기 시작했다. 정부는 지난달 12일 열린 ‘제43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에서 ‘항공정비(MRO)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을 의결했다. 항공엠아르오를 “성장 잠재력과 부가가치가 높으며 양질의 일자리 창출 기회가 큰 산업”으로 평가하며 “2030년까지 국내 항공엠아르오 시장을 5조원 규모로 확대해 일자리 2만3천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국내 항공정비 물량 확대 지원, 가격경쟁력 확보, 항공정비 기술역량 강화, 엠아르오산업 성장기반 조성 등 4대 추진방향도 내놨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디어 항공엠아르오가 항공산업의 전방산업으로 키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천/글 김재섭 선임기자 jskim@hani.co.kr, 사진 한국항공서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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