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 땐 그랬었지 추억의 NBA 해설가들이 말하는 라떼는 말이야 (2)
"매니아층의 니즈(needs)를 충족시키는 해설 추구"
미국 유학과 경향신문 체육부를 거친 유신모 기자는 ‘매니아→기자→해설자’로 발전한 케이스다. 현재 신문사에서 국제부에 근무하며 휴일을 이용해 해설을 했다고 한다. 유신모 위원의 해설은 친절함 그 자체였다. 그는 해박한 지식을 기반으로 시청자들에게 친절한 설명은 물론 경기 흐름에 대해 조목조목 차분히 풀어냈다. 유 위원이 NBA 해설에 흥미를 갖게 된 건 여타 해설위원과는 조금 다르다.
“미국 대학농구(NCAA)를 보면서 해설에 흥미를 갖게 됐어요”라고 말한 유신모 위원은 해설위원의 시작점으로 NCAA를 짚었다. 그는 “제가 처음 중계 마이크를 잡았던 1998년에는 NBA가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 개막 일정이 무기한 연기됐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체용으로 NCAA를 중계하게 됐는데, 너무 재밌는 거에요. NBA와는 완전 다른 세계였던 거죠"라면서 "NCAA 선수들은 기본기가 탄탄해요. 룰도 NBA와는 다르기도 하고 아기자기하니 보는 맛이 있죠. 선수마다 플레이스타일이나 성향이 모두 달라요. NBA를 곧 누빌 선수들이기도 하니 한 선수, 한 선수를 분석하는 재미도 있었던 거죠. 또, NCAA에서 한 해 졸업하는 학생 수만 수천 명이다. 그들 중 NBA 드래프트 되는 학생들은 60명 밖에 없어요. 그야말로 치열한 생존의 무대에요.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까지 더해져 보는 재미가 배가 됐죠. 비록 3개월 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당시 NCAA라는 무대가 생소한 국내 팬들에게는 이 무대가 어떤 곳인지 소개한다는 생각으로 재밌게 해설했던 기억이 나네요”라고 말했다.
열악한 중계 환경 속에서도 유 위원은 한 차원 높은 수준의 해설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는 “공중파 중계는 NBA에 문외한인 대중들이 많이 시청하기 때문에 기본적인 지식만으로 해설이 가능해요. 하지만 스포츠채널과 같은 케이블 중계는 달라요. 새벽 시간대에 잠 안 자고 NBA 중계를 볼 정도면 보통 팬들이 아닐거에요. 그래서 이런 매니아 팬들의 니즈를 채워주기 위해서는 한 차원 높은 수준의 해설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죠. 예를 들어 보통 NBA 경기를 보다 보면 볼을 주로 다루는 스타플레이어들에게만 시선이 가게 돼요. 그런데 저는 해설할 때 볼을 가지고 있지 않던 선수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봐요. 위크사이드에 위치한 선수의 움직임에 따라 그 팀이 공격이 얼마나 잘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거든요.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그런 미세한 부분을 빠르게 캐치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했죠. 그러면서 농구를 보는 시각도 넓어지고, 더 재밌게 농구를 보면서 중계를 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3년 넘게 NBA 중계를 해왔던 유신모 위원에게 잊을 수 없는 경기는 1997-1998시즌 유타 재즈와 시카고 불스의 파이널 3차전이다. 유타는 홈에서 열린 1차전에서 시카고를 88-85로 잡았지만 2차전은 시카고가 93-88로 역전승을 거두면서 1승1패가 됐다. 3차전 결과가 중요해졌다. 시카고의 필 잭슨 감독은 당시 변칙적인 수비를 들고 나와 존 스탁턴으로부터 시작되는 유타의 픽앤롤을 봉쇄했다. 당시만 해도 NBA는 지역방어를 쓰지 않던 시절이다. 스카티 피펜은 일리걸 디펜스(지역방어 금지 룰)의 경계선을 교묘히 오가며 유타의 픽앤롤을 무력화시켰다. 경기 후 슬로언 감독은 심판들이 피펜의 수비를 일리걸 디펜스로 불지 않은 것에 공개적으로 비난을 했지만, 이미 시리즈 분위기는 시카고로 넘어간 후였다. 이후 유타는 시리즈 전적 2승 3패까지 따라붙었지만, 6차전에서 다 잡았던 경기를 그 유명한 마이클 조던의 ‘더 샷’에 넘겨주며 2년 연속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유 위원은 “중립을 지켜야 하는 해설위원으로서 유타를 응원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유타가 심판 판정에 다소 억울 할만 했다고 생각해요. 시카고 입장에서는 유타의 픽앤롤 공격 패턴이 워낙 막기 까다롭다 보니까 변칙 수비를 들고 나온거죠. 앞선에 있던 스카티 피펜이 일리걸디펜스 경계선을 넘나들며 교묘히 스탁턴으로부터 시작되는 픽앤롤 공격을 봉쇄했어요. 한 두 개면 모르겠는데 여러 차례 그런 수비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논란이 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그 상황이 치열한 접전이 오간 승부처였기 때문에 심판 콜은 불리지 않았고 결국 시카고가 3차전을 이기면서 시리즈 전체 판도를 잡을 수 있었어요. 반대로 심판 판정의 희생양이 됐던 유타 벤치에선 완전 난리가 났죠. 다만 당시 해설위원의 입장에선 그때의 판정 논란이 좀 흥미로웠어요. 보통의 팬들은 누가 득점을 하고, 덩크슛을 꽂아 넣었는지 단순한 시각에서만 보게 돼요. 하지만 그런 규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보면 농구를 더 재밌게 볼 수 있어요. 그렇게 넓은 시각에서 시청자들에게 상황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동시에 자신을 해설위원으로 데뷔시켜준 이정천 MBC PD에게 감사하다는 언급도 잊지 않았다. 기존 방송사 중계의 어렵고 딱딱한 해설을 탈피해, 마치 농구를 잘 아는 동네 형과 함께 관람하는 듯한 중계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이 PD가 큰 도움을 줬다고.
그는 “이정천 PD님께서 NBA 중계는 딱딱하고 정석적인 중계보다는 친한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맥주 한잔의 여유를 즐기는 분위기 속에서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기존의 어렵고 딱딱한 중계 분위기의 틀을 깨기 위해 이 PD님께서 많이 고민하고 노력하셨어요. 중계 용어적인 측면에서도 예를 들어 기존에 사용하던 워킹 바이얼레이션, 후보 선수 등의 용어를 트레블링 바이얼레이션, 벤치 멤버와 같이 미국식으로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풀어주셨어요. 아마 그 당시 저 뿐만 아니라 NBA 중계를 하던 해설자, 캐스터들은 이정천 PD의 영향을 엄청 받았을 거에요. 저 또한 이정천 PD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해설가로서 경험을 하기 쉽지 않았을 거에요”라고 이정천 PD에게 감사함을 전했다.
이어 중계 파트너로 호흡을 맞췄던 김성주 캐스터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유 위원은 “김성주 캐스터와 중계 호흡을 가장 많이 맞췄는데, 저 때문에 굉장히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때 당시에는 컴퓨터 문화가 발달하지 않던 시절이라 중계 관련 정보를 얻는 데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어요. 보통 NBA 결장자, 경기 정보 등은 새벽에 웹 사이트에 업데이트가 되는데, 한번은 김성주 캐스터가 중계 전날에 집에 안 가고 PC방에서 밤을 새가며 중계 준비를 한 거에요. 중계 준비를 다 마친 뒤 찜질방에서 같이 자고 다음 날 방송국으로 출근 중계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그 시절만이 가질 수 있는 추억인 거 같네요”라고 덧붙였다.
#유신모 해설위원 프로필
1963년 생
조지워싱턴대학 졸업
경항신문 기자(1994년~)
한국스포츠TV NBA 해설위원
MBC ESPN NBA 해설위원
現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그보다 더 NBA를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마니아는 어려서부터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NBA 전문가인 최연길 해설위원은 어려서부터 농구 없이 못 사는 영락 없는 소년이었다. 유년 시절 최 위원은 농구를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반은 농구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농구에 관심이 있으니 관련 서적도 사고 영상도 보면서 지식을 쌓곤 했죠. 왜, 공부를 억지로 하면 효율이 떨어진다고 하잖아요. 그만큼 내가 좋아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갖고 이리저리 찾아보게 됐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루키, 점프볼 등 농구전문잡지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며 유명세를 떨쳤던 그는 2000년 SBS 채널에서 NBA 중계를 시작하며 그가 원하던 해설위원으로 전향, 발을 넓혔다.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선수 출신들의 고유 영역이였던 해설위원이라는 직업은 최연길 위원이 해설을 맡게 되면서 편견이 많이 깨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이어 손대범, 조현일, 박세운 등 여러 비 선수 출신들이 해설위원로서 꿈을 키우게 됐고 이제는 많은 이들에게 꿈의 직장이 됐다. 그렇다면 글을 쓰던 그가 어떻게 해설위원으로서 데뷔하게 된 것일까.
최 위원은 “어릴 적부터 해설위원에 대한 꿈을 갖고는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저는 선수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실적인 벽에 부딪혔어요. 그 당시만 해도 선수 출신 해설위원들이 득세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이종률, 이호인 등 비선수 출신들이 MLB, NBA에 해설위원으로 데뷔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때 ‘아 나도 할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갖게 됐어요. 그 후 NBA 파업 시즌 때 대체 방송으로 NCAA 경기가 전파를 탄 적이 있는데, 제가 직접 방송국으로 찾아가 담당 PD님과 당시 해설을 하던 유신모 해설위원께 NCAA에 관한 정보를 제공해 드린 적이 있어요. 그때 PD님과 인연을 맺게 돼 2000년 SBS에서 처음으로 헤드폰과 마이크를 잡게 됐던 거죠”라며 해설위원으로서 출발점을 소개했다.
당시만 해도 농구 용어가 일본식으로 중구난방 사용되었던 시절. 그는 중계 마이크를 잡으면서 올바른 농구 용어부터 정립하고 주입했다. 미들 레인지, 풀-코트 프레스, 페네트레이션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최 위원은 “어느 날 모 해설자가 엉터리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본 뒤로 내가 중계할 때만큼은 이것만큼은 반드시 잡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중계에서 사용하는 농구용어가 곧 농구를 즐기는 팬들에게 그대로 전파가 되잖아요. 잡지에서 선수 이름이 틀리거나 애매한 용어가 기입 되어 있으면 그 잡지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듯이, 방송도 똑같아요. 그만큼 중계를 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부분이라고 여겼던 거죠”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지금 NBA 중계를 하고 있는 모 해설자도 정식 농구용어가 아닌 속어를 종종 사용하곤 해요. 예를 들어 림 어택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은 명백히 잘못된 표현이에요. 해설자가 림 어택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다 보니 옆에 있는 캐스터까지 똑같이 따라서 하고 있어요. 이처럼 틀리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는 반드시 바로 잡아줘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올바른 용어 사용에 대한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없었을까. 그는 “종종 경기를 보다 보면 현지 중계진들도 헷갈려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해요. 예를 들어 속공 상황에서 드리블러나 공격 팀 선수에게 고의적으로 파울을 할 경우에 패널티를 주는 클리어-패스-투-더 바스켓 파울이 있잖아요. 한번은 클리어 패스 투 바스켓 파울과 같이 판정하기 애매한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제가 먼저 현지 중계진보다 '아 이건 클리어 패스 투 더 바스켓 파울입니다'라고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한 적이 있어요. 현지 중계진은 제가 멘트를 한 다음에서야 클리어 패스 투 더 바스켓 파울이라고 설명했어요. 그럴 때 저에 대한 신뢰도는 더 높아지는 거에요. 그런 식으로 전술이나 규칙 등 제가 가지고 있던 기초 지식을 잘 살려 중계했던 게 초반부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죠”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미디어 콘텐츠가 발달함에 따라 NBA 중계 환경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특히 최근에는 농구 중계가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고 있는 추세인 만큼 팬들의 해설위원과 캐스터 간의 캐미와 승부처에서의 높은 텐션과 정확한 전달력 등 다양한 요소들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최 위원은 한마디 보탰다.
그는 “제가 NBA 해설하던 시절에는 마이클 조던의 경기를 보고 유입된 팬들이 많았고, 그 때 당시 NBA는 마니아적인 성향이 짙었죠. 지금은 그때와는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어요. 스테픈 커리라는 새로운 스타가 등장했고, 중계를 보는 팬들의 시각도 달라지고 있어요. 현 시대에서 새로운 팬층을 끌어모으기 위해서는 재미 위주의 중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현재 SPOTV NBA 중계를 하고있는 조현일, 박세운 해설위원은 저보다 훨씬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NBA의 매력을 꼽아달라는 질문하자 최 위원은 ‘스타’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그는 “단체 스포츠 종목 중 농구가 인원이 가장 적어요. 즉 한 선수의 영향력이 엄청 높다고 볼 수 있죠. 야구를 예로 들면, 타자가 한 경기에서 타석에 들어가는 횟수가 많아야 5번이에요. 그런데 농구는 한 경기에 20번~30번 넘게 슛을 쏘는 게 가능하잖아요. 마이클 조던이 한 경기에 슛 50~60개씩 쏴도 뭐라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스타에게 기회를 무한대로 몰아줄 수 있는 것, 그게 농구의 매력인 것 같아요”라면서 “또 한 가지, KBL의 경우 감독과 선수가 불화가 나면 그 선수는 무조건 트레이드돼요. 그런데 NBA는 선수가 갑이에요. 감독과 선수 간의 마찰이 생기면 감독이 먼저 옷을 벗어야 해요. 그런 측면에서 NBA는 스타의 능력이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리그에요”라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비선수 출신이라는 설움과 견제를 극복하고 20년 넘게 굳건히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최연길 해설위원. 이제는 그런 그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아 비 선수 출신 해설위원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끝으로 최 위원은 훗날 NBA 해설위원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조언의 말을 건네며 인터뷰를 마쳤다.
최 위원은 “지금도 기자 출신 후배들이 저에게 자주 물어보는 질문이에요. 제가 해주고 싶은 대답은, NBA라는 것은 결국 농구에요. 농구를 모르면 NBA 해설을 할 수 없어요. MLB 해설을 하고 싶으면 야구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요. 저도 해설위원을 하기로 본격적으로 마음먹었을 때 제일 처음 했던 게 NBA와 NCAA 규칙서를 사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거였어요. 규칙을 모르고 해설한다? 제 상식 선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앞서 말했던 클리어 패스 투 바스켓 파울과 같이 애매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해설자가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설명을 못 한다면 그건 해설자로서 자격 미달에 해당한다고 생각해요. 더구나 NBA는 특수 분야이기 때문에 일단 기본적으로 농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어야 해요. 전술이나 규칙은 물론 팀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서도 깊게 알아야 한다고 봐요”라며 소신있게 말했다. 또한 “한 마디 더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잘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어요. 시청자들은 질 낮은 중계보다 질 높은 중계를 보고 싶어하거든요. 그리고 내가 정말로 이 업계로 진출하고 싶다고 한다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어야 해요. 우리나라에서 스포츠 미디어의 보수는 높지 않은 편이에요. 내가 단칸방에 살면서 차 한 대 없이 살 수 없는 형편이 되더라도 이 일을 그토록 하고 싶다면, 한번 도전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네요. 그게 아니라면 빠르게 다른 일을 알아보는게 좋을 거에요”라며 현실적인 조언도 곁들였다.
#최연길 해설위원 프로필
1971년 생
연세대 지질학 학사
루키, 점프볼 칼럼니스트
SBS 스포츠 NBA 해설위원
MBC ESPN NBA 해설위원
現 MBC 스포츠플러스 농구 해설위원
농구학자라 불리는 손대범 現 KBS 스포츠 농구 해설위원도 1세대 NBA 해설위원 출신이었다. 시계를 2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당시에는 대학생 손대범이었다. 현 세대들은 잘 상상이 가지 않겠지만. 한창 놀기 바쁜 시절에 농구에 미친 청년은 글을 쓰고 마이크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훗날 국내농구 잡지를 책임지는 위치까지 올라섰고,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으며 농구학자라는 칭호까지 얻게 됐다. 그때 그 시절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농구학자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13가지 문답으로 손대범 해설위원의 청춘의 추억을 회상했다.
Q. 해설위원으로 데뷔하기 전까지는 루키 등 NBA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매체에서 글을 주로 썼다. NBA 해설자가 된 계기가 있다면?
A_그야말로 우연이고 행운이었다. 경인방송(iTV)에서 새 얼굴, 젊은 얼굴을 찾는 와중에 글을 쓰던 내가 발탁됐다. 2002년, 23살이었으니 너무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였다. 개인적으로는 영광이기도 했지만 부담이기도 했다. 한 시즌을 한 뒤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다가 2004-2005시즌에 수퍼액션에서 다시 제의가 왔다. 그때는 최인선 해설위원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는데 그때 두 시즌을 하면서 많이 배웠다.
Q. 원래 해설가로서도 꿈이 있었나. 사실 글로만 정보, 소식 등을 팬들에게 전달했지, TV 앞에 서서 말로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은 처음이라 낯설 법도 했을텐데?
A_해설위원은 누구에게나 꿈이었다. 유신모, 이호인, 장원구 선배 모두 농구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최연길 해설위원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나에게는 롤모델과도 같았고, 그 분이 갖고 있는 지식의 깊이는 여전히 나로서는 따라가기 힘든 수준이다. 중요한 건 이런 지식을 적재적소에 꺼내서 위트있게 포장해서 전달하는 것인데, 그런 부분이 내게는 너무 힘들고 낯설었다. 또 PD님께서 자신있게 말하라고 강조하셨던 게 기억에 남는다.
Q. NBA 첫 중계방송이 기억나는가.
A_2001년 12월 7일 워싱턴 위저즈와 휴스턴 로케츠 경기다. 그때 마이클 조던이 무릎 부상으로 결장이 예상된다고 했는데, 예상을 깨고 복귀했다. 마이클 조던의 경기라니! 내게는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경기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조던이 18득점을 했고 팀이 이겼다는 것은 기억한다. 조던이라는 사실에 너무 떨려서 '네, 그렇습니다'만 수십번 반복한 것 같다. 중계가 끝나고 '네, 그렇습니다'라며 날 놀리는 친구들이 많았다(웃음). 반면 게시판에는 '학예회 하나요?'라는 글도 올라왔다.
Q. 해설위원들마다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본인은 어떤 유형의 해설위원이 되고자 했는가?
A_나는 기록, 스토리, 특성 등 선수 출신들이 쉽게 전달하지 못하는 쪽의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은데, 역시나 말처럼 쉽지 않다. NBA는 유독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조현일, 박세운 위원이 정말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깊고, 유머러스하며 함께 흥분할 줄도 안다.
Q. 선배 혹은 동료 해설위원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지, 아니면 혼자 독학으로 파고들었나. 또 그 당시 해설자 중 롤모델로 삼은 해설자가 있다면?
A_롤모델은 최연길 해설위원이었고, 충고도 많이 받았다. 농구에 대한 부분은 최인선 해설위원이 많이 가르쳐주셨다. 2년 동안 중계가 있는 날이면 항상 중계 전에 그 팀의 다른 경기를 같이 보며 성향을 파악했고, 끝난 뒤에도 그 경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노하우를 전수 받았다. 사실상 두 분이 내 밑천을 깔아주셨다. 방송과 관련해서는 김동연 캐스터, KBS 김현태 아나운서, 김기웅, 강성철 아나운서가 내게 애티튜드를 알려주고, 항상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Q.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농구 경기 중계를 경험했다. 그 중에서도 NBA 중계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NBA 중계만이 주는 재미와 매력이 있다면?
A_NBA 경기는 항상 환호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선수마다 캐릭터가 할 말이 풍부하다. 화려한 플레이도 그렇지만 다양한 매치업과 상황별 전술, 뒷이야기 등 이야기가 풍성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도 같다. KBL, WKBL, 대학리그도 매력적이지만, 30개 팀의 450명이 넘는 선수들이 펼치는 한 시즌을 팔로우하다보면 이야깃거리가 끊임없이 나온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Q. 당시만 해도 중계 환경이 녹록지 않았다. 중계 중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A_그래도 나는 운이 좋았다. 지금처럼 영상 자료가 많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으로 자료를 구하고 소식을 접하기 편했으니까. 다른 선배님들은 팩스로 해외에서 구하고, 서적을 구하는데 애를 많이 썼다고 들었다. 내가 할 무렵에는 NBA 아시아가 배정하는 경기만 할 수 있었다. 당시 NBA 아시아는 오로지 야오밍과 중국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한 시즌의 절반 이상이 휴스턴 로케츠 중계였고, 그렇지 않으면 하승진의 포틀랜드 블레이저스였다. 나중에는 두 팀의 중계는 홈팀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쉽게도 휴스턴은 부상자가 많아 전력이 일정치 않았고, 포틀랜드는 성적이 나지 않아 시청률이 나오지 않았다. 하승진이 1쿼터부터 나오는 위치의 선수가 아니었기에 팬들도 아쉬웠을 것 같다.
Q. NBA 해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아달라.
A_하승진이 주전으로 출전했던 경기도 기억에 남고, LA 레이커스와 마이애미 히트의 크리스마스 매치업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2005년 12월 26일 새벽에 했는데, 코비 브라이언트와 드웨인 웨이드의 활약이 기억에 남는다. 바로 전날 크리스마스 저녁이 지금 와이프와 첫 저녁 식사를 한 날이기도 했다. 스티브 내쉬의 피닉스 선즈는 8초 이내 공격으로 NBA에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는데, 최인선 위원이 충격을 많이 받으셨다. 아무래도 '정통 농구'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최인선 위원은 피닉스가 우승하면 자신의 농구 철학이 많이 바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Q. 캐스터와의 호흡도 중요하다. 당시 누구와 가장 많이 호흡을 맞췄는지.
A_NBA는 김동연 캐스터와 제일 오래했다. 거의 나를 업어 키웠다. 해설자가 캐스터보다 어린 경우는 그때만 해도 많지 않았다. 거의 친형처럼 돌봐주시고 충고해주셨다. 심지어 중계 중에 물은 언제 얼마나 마셔야 하는지, 넥타이는 어떻게 메야 하는지까지도. 잊지 못할 선배다.
Q. 시대가 바뀌면서 NBA 트렌드도 완전히 바뀌었다.
A_내가 마지막으로 미국농구를 해설한게 10년이 넘었다. 최연길 위원이 미국 출장을 가면서 대타로 올스타전을 했는데 그때도 정신없었다. 지금하면 더 정신없을 거 같다. 페이스가 엄청 빨라졌다. 또한 팬들의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그때도 마니아는 많았지만 저변에 넓진 않았다. 구단 소개, 선수 소개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밟아갔다면 지금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 해설하는 분들은 더 많이 준비를 해야 하기에 힘들 것 같다.
Q. KBS N을 통해 여자농구 중계를 하고 있지만, 손대범 해설위원의 NBA 해설을 그리워하는 팬들도 많은데.
A_아마 그런 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하하. 스포티비에 조현일, 박세운 위원 뿐 아니라 이민재 위원도 정말 잘하고 있다. 4년에 한 번 올림픽 중계를 통해 르브론 제임스, 케빈 듀란트와 같은 익숙한 이름들을 불러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결승이 내 생애 첫 올림픽 중계였는데, 코비 브라이언트의 클러치슛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는다.
Q. 만약 지금 NBA 해설을 맡게 된다면 어떤 시각, 방향성에서 해설을 할 생각인지.
A_내가 처음 해설을 할 때는 NBA가 대중적이지 않았다. 선수 소개, 팀 소개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NBA 팬들의 수준이 높아졌다. 많이 힘들 수도 있다. 그래도 스토리에 토대를 두고 감독이 내리는 결정과 변화에 더 집중하게 될 것 같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선수 출신 중에 정말 NBA를 잘 아는 분이 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선수만이 가질 수 있는 경험에 정보와 스토리가 더해진다면 팬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필리핀이나 중국에는 그런 분들이 계신다고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젊은 해설자가 더 많이 등장해야 한다. 누구나 미숙한 시절이 있다. 연습과 평가받을 기회가 계속 주어지면 좋겠다. 그래야 시장도 커지고 후배들도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는 루키 더 바스켓의 이동환 기자나, 나를 인터뷰하고 있는 서호민 기자 같이 20~30대들이 마이크를 잡는 날이 오면 좋겠다.
Q. 당시는 20대 손대범이었다. 말 그대로 패기와 열정으로 가득차던 시절이다. 지금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본인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될 것도 같은데.
A_20대 손대범의 아이디는 '철인23호'였다. 농구에 미쳐있었고 정말 몇 날 밤을 안 자도 끄덕없던 시절이었다. 그때 경험 덕분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겁 없이 도전했고 잃을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반면 어느 순간부터 발전이 멈춘 것 같아 자학도 많이 하고, 공부도 많이 하고 있다. 믿고 들을 수 있는 그런 해설자가 되고 싶었다. 처음 방송할 때 카메라 들이미는데 떨리거나 그런게 없었다. 말이 너무 빠르다고 해서 말하는 속도를 줄이기도 했다. 방송을 즐기면서 했다. 응원하고 소리만 못 지를 뿐이지 5년 동안 출입할 때 그 느낌 그대로 가져갔다.
1980년 생
연세대 경영정보학 학사
농구전문매거진 점프볼 편집장
경인방송(iTV) NBA 해설위원
MBC ESPN NBA 해설위원
現 KBS N 스포츠 해설위원
#사진_본인 제공, 서호민 기자
점프볼 / 서호민 기자 syb2233in@jumpba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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