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부터 깜깜해질 때까지 일했습니다, 머리가 울퉁불퉁해질 정도로 맞아가며" [책에서 만난 문장]

김용출 입력 2021. 9. 1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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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후마니타스 제공
“다음날 새벽 3시부터 바로 일을 시켰습니다. 낮은 산을 깎아 궤도 화차에 흙을 실어 날라 낮은 땅을 평탄하게 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깜깜해질 때까지 일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지만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매일 이러다 죽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이 늘어났지만 필사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한계가 있습니다.”

―도노히라 요시히코, 지상 옮김, [70년 만의 귀향], 후마니타스, 21쪽.

1980년대 이후 일본의 북단 훗카이도 곳곳에서 일제 강점기에 희생된 조선인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 발굴 작업이 시작되면서 함께 발굴돼 올라온 조선인 강제노동 이야기입니다. 조선인 강제노동의 희생자 발굴과 그들의 구체적인 진실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위해선 지난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상쾌한 가을 날씨가 펼쳐진 1976년 9월 3일 오후, 정토진종 홋카이도 사찰인 이치조지(一乘寺)의 젊은 승려 도노히라 요시히코(殿平善彦)는 중고차를 마련한 기념으로 친구와 함께 홋카이도에서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인 슈마리나이댐과 주변 호숫가를 드라이브 중이었습니다. 까마득하게 펼쳐진 푸른 호수, 물결을 헤치고 나가는 작은 배, 울렁거리는 섬 같은 작은 바위들,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주변의 나무들….

“어머, 젊은 수법사 스님! 마침 잘 만났네요, 보여드릴 게 있는데, 혹시 함께 절에 가보지 않겠어요?”

도노히라는 이때 우연히 근처 식당에서 만난 할머니의 안내로 근처에 있던 사찰 고켄지(光顕寺)를 들러 절에 안치된 위패들을 보게 됩니다. 어슴푸레한 빛을 통해 드러나는 상자 안의 위패들, 목공 작업을 하고 남은 나무판을 겹쳐 만든 듯한 조잡한 모습. 그 중에 하나를 손에 들었습니다. ‘(앞면) 석현신 쇼와 15년(1940년) 8월13일 입적 (뒷면) 속명 김00 33세’.

그는 흠칫했지요.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의 그것으로 보였다. 절에 안치된 위패는 모두 80개 남짓. 일본인과 조선인의 이름이 뒤섞여 있었고, 위패에 쓰인 사망 연도는 1935년부터 1945년까지 10년 사이였습니다. 아시아 태평양전쟁 속에 희생된 이들의 위패였어요.

홋카이도로 이민 온 식민 지배인의 자손인 도노히라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교토의 류코쿠대학을 다니며 종교인 평화운동을 접했고, 야스쿠니신사 문제를 고민했으며, 일본 사회에서 재일 코리안이 맞딱뜨리던 차별 문제를 보며 괴로워했던 그였지요.

고켄지에서 찾아낸 ‘매·화장 인허증’에는 본적을 비롯한 최소한의 희생자 정보가 적혀 있었고, 그 가운데 조선인 희생자 15명은 한국 출신이라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도노히라와 동료들은 이를 바탕으로 강제징용 역사와 희생 정황을 조사하는 한편,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 희생자 유족들을 찾아 나섭니다.

다만 당시 한국에선 군사정권이 집권하고 있고 한·일간 교류가 거의 이뤄지지 않던 상황이어서 한국에 가서 유족을 조사하거나 한국 정부에 희생자 유족 조사를 요청할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1977년 2월, 강제노동을 경험한 재일 코리안 채만진의 제안으로 한국인 희생자들의 주소로 희생자 정보와 함께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지요.

“알립니다. 이번에 일본 홋카이도 주민들을 중심으로, 소라치 지방의 민중사를 조사하는 단체인 ‘소라치 민중사를 이야기하는 모임’을 통해 소라치 민중사, 특히 일본에 끌려온 조선 동포들의 역사를 조사한 결과 슈마리나이댐 공사에서 ‘000씨’가 희생된 것이 확인됐습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 단체로 연락해 주길 바랍니다. 일본 홋카이도 후카가와시 다도시 이치조사 소라치 민중사를 이야기하는 모임 앞.”

놀랍게도 3월부터 한국에서 답장이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소가 확인돼 편지를 보낸 14명 가운데 7명에 해당하는 7통의 답장이 도착했지요. 미흡하지만 희생자 유가족과 연결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죠.

“부친인 김00씨가 노무자로 끌려가 사망했지만 원인은 알 수 없고 그쪽 형편대로 처리되어 사체만 고국으로 운송돼 매장했습니다. 일제 치하라 식민지 민족이 일언반구도 할 수 없이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보고 들을 수도 없고, 아는 것은 수천 리 떨어진 타국에서 사망한 사실뿐이올시다. 국가가 무슨 대책이라도 수립하여 노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977년 3월 김00의 아들 김△△.”

희생자들의 유골 발굴 과정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유골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댐에서 1km 떨어진 곳이 사유지인데다가 마을 주민도 호의적이지 않았죠. 다행히 도노히라와 동료들의 노력으로 일본인 희생자 유족들이 지원에 나서면서 1980년 5월부터 희생자 유골 발굴이 이뤄지기 시작했고, 1984년까지 모두 16구를 지상으로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반발로 한동안 유골 발굴은 이어지지 못했고, 1992년에야 희생자 유족이 확인된 유골 2구가 천안 망향의동산에 안장됐습니다.

1997년 여름, 한국과 일본, 재일코리안 젊은이들이 어우러져 13년 만에 다시 슈마리나이에서 희생자 유골 발굴을 재개했지요. 2005년부터 사루후쓰촌 아사지노에서도 희생자 유골 발굴이 시작됐고, 2012년 아시베쓰시와 2013년 시가시가와정 에오로 발전소 유수지에서도 각각 유골 발굴 작업이 이뤄지면서 조선인 강제노동의 구체적인 진실도 본격적으로 발굴됐던 것이죠.

“그렇게 약해진 상태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본인은 마구잡이로 몽둥이를 휘둘러 때렸습니다. 박치기를 당해 혹이 난 것처럼 머리가 울퉁불퉁해졌습니다. 쇠 지렛대로 두들겨 맞아 그대로 땡볕 아래 연못에 빠져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탈출을 시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도망치다 붙잡히면 맞아 죽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경우를 본 것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었습니다….”(21쪽)

유족이 확인된 유골들은 한국으로 봉환됐지만 희생자가 조선인이 분명했지만 유족을 확인하지 못해 반환하지 못한 유골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본원사 삿포로 별원의 71구와 슈마리나이에서 발견된 4구, 사루후쓰촌 아사지노 공동묘지에서 발굴된 34구, 비바이 상광사에 안치된 6구 등 모두 115구. 한국과 일본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이들 유골은 2015년 9월에야 한국으로 봉환됐지요. 70년만의 귀향이었어요.

홋카이도 이치조지 주지인 도노히라 요시히코의 책 ‘70년 만의 귀향’은 바로 홋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들의 유골 발굴 및 귀환 기록을 담은 책입니다. 저자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통해 현장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당한 이야기, 도망가지 못하도록 밖에서 자물쇠를 걸어두는 감금노동, 이른바 ‘다코베야’의 현실, 엄혹한 작업 환경 속에 쓰러져가는 노동자들의 모습 등 당시 참혹했던 현장 분위기를 세세하게 전하는 한편 강제노동을 하다가 희생된 조선인 115명의 유골을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과정도 접합니다, 아주 담담한 필치로요. 코로나19 속에서도 고향에 잘 내려가고 계신가요. 당신은 이번 추석 고향에서 어떤 진실들을 캐올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지요.(2021.9.19)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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