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차 이상 '활동가'들로 채워질 것" 경력법관 선발 두고 판사들 우려

양은경 기자 2021. 9. 19.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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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법원조직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이 재석 229명 중 찬성 111명, 반대 72명, 기권 46명으로 부결되고 있다. /뉴시스

“능력보다는 특정 방향성이 강한 활동가들로 채워질 것”

최근 판사 임용자격을 법조경력 5년 이상으로 낮추는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부결된 후 판사들 사이에 이런 우려가 나오고 있다. 당장 내년부터 7년차 이상 법조인들을 대상으로 판사를 뽑게 돼 지원자가 부족해지면서 자칫 특정 방향성을 가진 인사들이 ‘목적’을 가지고 법관을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1년 경력법조인 중에서 판사를 뽑는다는 ‘법조일원화’ 방침이 도입되면서 현재는 경력 5년 이상의 변호사들을 선발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7년 이상을, 2026년부터는 10년 이상으로 순차적으로 ‘경력 상향’을 할 계획이었지만 지원자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쳤다. 그러자 행정처가 판사 임용 자격을 경력 5년 이상으로 완화하는 개정안을 냈지만 지난달 31일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다. 판사 출신인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법조일원화 취지에 역행한다.김앤장 출신 판사가 양산될 것”이라고 반대토론을 한 게 크게 작용했다.

개정안이 부결된 후 판사들 사이에서는 한 부장판사가 단톡방에 썼던 글이 ‘성지글’ 처럼 돌고 있다. “임용시험을 자동차 면허 시험 수준으로 만든 후 10년 경력 이상의 법조경력자들을 모시면 능력보다는 방향성이 강한 10년차 활동가 법조인들로 사법부가 채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지난 8월 13일 민주당 초선의원 ‘처럼회’가 법원 판결을 전면부정하는 성명을 낸 후 그들이 주장하는 사법개혁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며 썼던 이 글은 법원조직법 개정안 부결 이후 ‘법원의 미래를 예언한 글’ 이라며 공유되고 있다.

◇민변, 참여연대 “순혈주의와 엘리트주의 해소해야”

법조일원화를 예정대로 할 것을 주장하는 이탄희 의원이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참여연대 등의 주요 논거는 법관 구성의 다양화이다. 민변은 법원조직법 부결 후 성명을 통해 “법조일원화는 우리 사회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판사 상’에 대한 근본적 전환, 다양한 경험과 직역의 법조인들이 대거 법관으로 임명돼 법원의 순혈주의와 엘리트주의를 해소한다는 접근 등 사법개혁의 핵심 과제를 내포한 제도였다”고 했다.

민변이 ‘다양한 경험’을 강조한 데는 특목고, 서울대를 나와 김앤장에서 일한 사람만 판사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탄희 의원은 ‘김앤장 판사’ 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신규 판사 선발 과정에서 필기시험을 배제하고, 위원회 형식의 기구를 만들어 국회와 시민사회가 선발에 관여하자는 주장도 하고 있다.

법원 내부에서도 이 같은 시각에 동조하는 판사도 있다. 고승일 인천지법 부장판사는 지난 6일 법원 내부망 ‘코트넷’에 “사법권이라는 어마무시한 국가권력을 시험과 면접 등의 절차를 통해 거의 대부분의 의사결정을 법원이 하는 방식으로 법관을 선발하는 게 국민에게 최선이라는 생각을 누가 동조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썼다. 그는 “법관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보편적 가치관과 역사의식, 시대적 사명감 등에 대한 평가는 법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명백하다”며 “사법농단에 대한 진지한 반성도 없는데 과거 선발방식만 고집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인사 불이익을 입었다는 송승용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또다른 ‘사법농단’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김명수 대법원장을 향해 “이번 개정안의 통과를 위한 법원행정처 소속 법관들의 입법로비가 실제로 존재했는지 입장을 밝혀라”고 했다.

◇판사들 “순혈주의가 뭐가 나쁘냐” “시민사회 참여는 무서운 발상”

하지만 기존 법관 선발방식을 ‘순혈주의’로 공격하는 데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유정우 부산고법 판사는 다음날 코트넷을 통해 “순혈주의가 뭐가 나쁘냐”고 했다. 그는 “순혈주의에 대한 비판은 군법무관이나 재판연구원 출신이 짧은 변호사 생활을 마치고 다시 법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인데 그분들은 법원에 들어오면 안 되냐, 이것이 오히려 그분들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게 아니냐”고 했다.

유 판사는 “미국에서도 로클럭은 장차 법관임용을 생각하고 하는데 미국은 괜찮고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느냐”고도 했다. 그러면서 “대형로펌 출신이나 재판연구원 출신이 법관으로 임영되면 왜 순혈주의, 엘리트주의라고 비판받아야 하느냐”며 “순수한 동기로, 로펌 핵심 경경진 의사와 무관하게 지원하려는 분들이 훨씬 많을 텐데 그에 대해 ‘후관예우’ 딱지를 붙여 막아야 한다고 말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법원 내부에서는 지원자 감소라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개정안 부결을 우려하는 견해가 많다. 법원행정처가 국회에 제출한 법조 경력자 법관 임용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판사직 지원자 가운데 7년 이상~10년 미만이 158명(30.2%), 10년 이상 경력자는 43명(8.2%)에 불과했다. 한 현직 판사는 “넓게 봐서 ‘수련기간’ 이라고 할 수 있는 5년차 변호사만 해도 진로를 바꿔 법원에 들어올만 하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고 했다. 그는 “잘나가는 7년차, 10년차 변호사가 박봉에 지방근무를 감수하며 판사를 올 이유가 없다”며 “인력 풀 자체가 적은 데다 현재 직장에 부적응하거나 ‘워라밸’을 꿈꾸면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라고 했다.

특히 이탄희 의원이 개혁방안으로 거론한 ‘판사 선발 과정에서의 국회와 시민사회 참여’가 현실화될 것에 대한 우려가 크다. 김용희 울산지법 부장판사는 “국회와 시민사회가 시험없이 판사 지원자들을 헤아려 뽑자는 주장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대단히 무서운 발상”이라고 했다. 그는 “설마 의석수에 비례해 판사를 선발할 권한을 나눠 가지자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대륙법 체계를 취한 우리 나라는 영미법계 국가와 달리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사람을 판사로 뽑아 ‘도제식’ 수련을 거쳐 왔다. 판사들은 ‘요건 사실’에 맞춰 사실관계를 정리·판단하고 법리에 따라 결론을 내는 일을 해 왔다. 그런데 ‘시민운동가’ 들이 들어와 법리를 무시하고 ‘소신’에 따라 결론을 내는 일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한 중견 법관은 “다소 극단적이지만, 여성운동가가 성범죄 사건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유죄선고를 하고, 노동운동가가 사업주는 무조건 법정구속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고 했다.

또다른 판사는 “사회 제 세력이 법관을 뽑겠다는 것은 일종의 인민위원회를 상정한 것이냐”며 “10년 이내에 특정 성향 법관으로 법원이 차고 넘칠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 고위 법관은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곧바로 법관으로 선발되던 종래 시스템에서도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등으로 정치편향성 시비가 불거지는데 경력법관으로 시민단체 등의 ‘활동가’들이 들어오는 것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문제”라며 “그야말로 ‘재판은 곧 정치’가 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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