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계의 남성 철벽을 부순 '불꽃같은 생애'

한겨레 2021. 9. 1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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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한겨레S]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소피야 코발렙스카야(1850~1891)
대학 가려고 어린 나이에 결혼 결단
편미분 방정식 등 실력 출중했으나
여성 이유로 교수직 몇차례 퇴짜 뒤
박사 15년 만에 북유럽 첫 여성교수

<불꽃의 여자>는 시몬 페트르망이 쓴 시몬 베유의 평전 제목이고, <불꽃같은 생애>나 <불꽃처럼 살다간 러시아 여성 수학자>는 소피야 코발렙스카야의 평전들 제목이다. 세 책 원저의 제목은 물론 내용에도 불꽃이란 말은 없다. 나혜석을 다룬 책 제목도 <불꽃의 여자 나혜석>이다. 페미니즘이 불꽃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꽃이 아닌 불꽃’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나라 래퍼인 슬릭(30)은 앞뒤로 ‘나는 불꽃이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는 같은 제목의 노래를 부른다.

소피야 코발렙스카야. 위키피디아

불꽃에 비유된 소피야 코발렙스카야의 전기가 두권이나 번역되었다는 것은 평전, 특히 여성 평전이 그다지 많다고 볼 수 없는 현실에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앤 히브너 코블리츠와 코둘라 톨민이 쓴 평전은 각각 1997년과 2003년에 번역본이 나왔다. 그런데 피었다가 금방 사라지는 순간성을 강조하는 불꽃보다는 그 원인, 즉 평생 가부장 세계에 저항하여 치열하게 살다가 불꽃처럼 산화한 이단이라고 봄이 적절할지 모른다. 특히 지금까지도 남성들이 주류인 과학계에서는 여성이라는 점 자체가 이단이었다.

소피야 코발렙스카야. 위키피디아

유럽 최초의 여성 박사 됐지만

소피야는 1850년 모스크바에서 장군의 딸로 태어나 언니와 함께 자란다. 진보적인 그녀의 어머니는 두 딸에게 조기 교육을 시킨다. 그 시절을 소피야는 뒤에 이렇게 회상한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새로운 아이디어에 너무 열광했기 때문에 현재의 사회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우리가 꿈꾸던 자유와 보편적 계몽의 영광스러운 시기를 스스로 상상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굳게 믿었다.”

자매는 특히 러시아의 초기 사회주의 작가들인 체르니솁스키와 라브로프, 그리고 니힐리스트들의 영향을 받는다. 흔히 허무주의자로 번역되는 니힐리스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당시를 지배한 종교와 미신을 파괴하는 혁명인 과학이었다. 따라서 과학자는 곧 급진주의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수학에 흥미를 느낀 소피야가 아버지에게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대학 공부는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거부한다. 언니인 안나는 의학을 공부하고자 하지만 역시 아버지에게 거부당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여성이 아버지나 남편의 서면 허가 없이 가족과 떨어져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대학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육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남편을 찾는 것이었다. 안나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러시아어로 번역한 블라디미르 코발렙스키에게 자신이 독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결혼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나 그는 안나 대신 소피야를 선택한다. 소피야는 당시 열일곱살이어서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결혼할 수 없었지만, 코발렙스키와 동거한 뒤 결혼한다.

같은 해 안나도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의대생과 결혼한다. 안나 부부는 바쿠닌과 네차예프가 쓴 <혁명가의 교리문답>(1869)에 심취한다. “혁명가는 운명의 사람이다. 그에게는 사적 이해관계도, 사적 일도, 사적 감정도, 사적 유대도, 사적 재산도, 자신의 이름조차 없다. 그의 전체 존재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 하나의 생각, 하나의 열정인 혁명에 바쳐진다. 마음과 영혼은 말로써뿐 아니라 행동으로 사회질서와 문명세계 전체, 법, 예의, 관습과의 모든 관련을 단절한다. 그는 그 세계의 무자비한 적이며 그것을 파괴하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살고 있다.”

1869년부터 소피야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서 공부한 뒤, 예나대학교에서 고생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남편과 함께 영국 런던에서 당대 과학계의 이단들인 토머스 헉슬리, 찰스 다윈, 허버트 스펜서 등과 교류한다. 이어 1871년 소피야 부부는 안나 부부가 참여한 파리코뮌을 돕는다. 코뮌이 실패하자 안나는 런던으로 도망치고 남편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소피야와 아버지가 파리에서 구명운동을 하여 구출한다.

소피야는 1874년 박사 학위 논문으로 괴팅겐대학교에 ‘편미분 방정식’, ‘토성의 고리 역학’ 및 ‘타원 적분’에 관한 세편의 논문을 발표하고 수학박사 학위를 받아 유럽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여성이 된다. ‘편미분 방정식’은 오늘날 ‘코시-코발렙스카야 정리’로 불린다. 소피야는 대학에서 수학 강사가 되고 싶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았고, 그녀의 무료 강의 제안도 거부된다. 남편의 다양한 사업을 도왔으나 실패로 끝나 어린 딸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간다. 러시아에서도 소피야는 가르치고 싶었지만, 여성이라는 점과 정치적 견해 때문에 거부당한다. 남편의 사업도 계속 실패하여 파산에 이르고 결국 남편은 1883년에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남편 사후 오랫동안 우정을 나눴던 스웨덴의 배우이자 소설가였던 안네 샬로테 레플레르(왼쪽)와 함께한 소피야 코발렙스카야. 위키피디아

불꽃처럼 살았던 니힐리스트 걸

소피야는 188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대학교에서 사강사(대학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보수를 받으며 강의하는 개인 강사)로 지내며, 여배우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안네 샬로테 레플레르를 만나 죽을 때까지 ‘친밀한 낭만적 우정’을 나눈다. 1884년에는 5년제 계약교수가 되고 1888년에 당시 과학계의 최고상인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의 보르댕 상을 받는다. 1889년 그녀는 북유럽 대학에서 여성 최초로 스톡홀름대학교의 정교수로 임명되고 남편의 먼 친척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착을 거부하여 결혼은 하지 않는다. 1890년에는 자전적 소설 <니힐리스트 걸>을 발표했으나, 1891년 독감으로 사망한다. 41살의 나이였다.

로저 쿡은 2003년에 쓴 소피야의 새로운 평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녀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그녀가 극복해야 했던 어려움의 무게에 맞서 그녀가 성취한 것의 크기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를 더욱 존경하게 된다. 그녀는 역사상 극소수의 사람들이 달성한 영웅적 위상을 보여준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직 여성이 거의 탐험하지 않은 세계로 모험을 떠나… 사회가 그녀의 실패를 반쯤 예상하고 바라보는 동안 엄청난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했다.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학문에 지속적인 가치가 있는 두가지 주요 결과를 달성하는 것은 철의 훈련을 통해 개발된 엄청난 재능의 증거다.”

소피야의 생애는 1956년 이오시프 샤피로 감독의 영화 외에도 여러 차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소설로도 여러 편이 쓰였다. “나는 불꽃이다. 붉게 타올라 그 빛으로 앞을 밝힌다”로 끝나는 슬릭의 노래도 소피야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더 이상 한순간의 불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전 영남대 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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