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미디어 시대 창작품인가, 시장경제의 파생품인가

반이정 미술 평론가 2021. 9. 1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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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아트를 보는 복잡한 속내..원작의 재해석 두고 '갑론을박'도

(시사저널=반이정 미술 평론가)

"비엔날레는 공공성을 앞세운 주제, 정치적으로 올바른 취지, 나아가 세계적으로 유행한 사회과학 화두를 기획의 공식으로 굳혔다. 광주 비엔날레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민족주의 연구서 《상상의 공동체》를 차용해 전쟁, 분단, 냉전 등을 다뤘다. 어쩌면 비엔날레들의 다음 주제로 등판할 선수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나,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일지도 모른다. 비엔날레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미술이 어느덧 위대한 구호를 대변하는 매체로 둔갑해 있다. 냉전, 전쟁, 분단, 소외, 이산, 인종문제, 젠더 등 절박한 사회문제를 관철하는 진지한 대변인으로 변신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국내 미술 비엔날레들의 일정이 줄줄이 얼어붙기 전이던 지난 2018년 필자가 썼던 리뷰 내용 중 일부다. 지난 9월8일 11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가 3년 만에 다시 열렸다. '하루하루 탈출한다(One Escape at a Time)'는 주제로 코로나 팬데믹 장기화와 함께 수면 위로 떠오른 인종주의, 젠더, 계급, 정체성, 이주, 경제위기, 환경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고 보도자료에 언급돼 있다.

9월6일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가 3년 만에 다시 열려 주목된다. 사진은 2018년 9월 열린 비엔날레 모습ⓒ연합뉴스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3년 만에 열려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는 뉴미디어의 확산이 미술 행위에 영향을 미치던 뉴밀레니엄(2000년) 때 첫 회를 열면서 미디어 아트에 특화된 비엔날레로 차별화를 꾀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미술 비엔날레는 이론 중심의 무거운 표제를 앞세웠고, 전시장을 채운 비디오 아트 특유의 지루함까지 더해지면서 관람객의 피로감을 쌓아왔던 게 사실이다.

이번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개막에 앞서 공교롭게 한 대학 학보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는데, 질문의 요지는 이런 거였다. 최근 SNS에서 유행하는 포토존 느낌의 미디어 아트 전시회를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포토존 느낌의 미디어 아트'가 뭐냐고 내가 되물었더니, 학보사 기자는 '모네, 빛을 그리다' 전시를 예로 들었다. 이 전시는 5~6년 전부터 모네, 르누아르, 반 고흐, 고갱, 클림트처럼 종래 블록버스터 전시회에 단골로 이름을 올렸던 서양 명화가들의 원화를 가져와서, 역동하는 초대형 고해상도 영상으로 구현하는 기획물로, 블록버스터 전시의 차세대 주자 격으로 평가받는 뉴미디어 전시의 한 유형이다.

평면 프레임에 조용히 고정된 그림을 다중 채널의 스크린 및 영화 품질의 서라운드 사운드와 결합시켜, 관객을 공감각적으로 자극하는 뉴미디어 기술의 산물이다. 몇 해 전부터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정신처럼 인용된 4차 산업을 연상시킬 목적에선지, 이런 부류의 전시를 국내에서 컨버전스 아트(Convergence Art)로 통칭하는 분위기다. 뉴미디어 전시라는 공통점을 제하면,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와 '모네, 빛을 그리다' 같은 컨버전스 아트 전시는 서로 대척점에 있다.

미디어 비엔날레는 뉴미디어 시대에 최적화된 미술 창작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주류 미술계에선 높은 위상의 행사로 간주된다. 하지만 비디오 아트 특유의 지루함에 인습적인 무거운 주제에서 탈피하지 못한 면이 분명히 있다. 반면 '모네, 빛을 그리다'는 일산 킨텍스, 용산 전쟁기념관, 대전 컨벤션센터 등 엑스포급 스케일을 유치할 만한 공간을 잡아, 기한을 정하지 않고 오픈런 방식으로 전국 도시를 순회하며 앙코르 연장을 이어간다. 두 전시 사이에 나타난 수치상의 큰 격차로부터, 미술·전시를 이전과는 다른 성질로 변화시키는 뉴미디어의 선택압(다양한 형질 중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에 유리한 형질이 선택되게 만드는 자연의 압박)을 느끼게 된다.

국내에서 '컨버전스 아트'로 불리는 차세대 블록버스터 뉴미디어 전시의 시작은 서구에서 먼저 일어났다. 관객의 공감각 자극을 극대화하는 점 때문에 서구에서는 '몰입형 예술(Immersive Art)이라 부르기도 한다. 관객몰이 규모도 어마어마해 반 고흐를 주제로 정한 몰입형 미술 전시인 '반 고흐 얼라이브(Van Gogh Alive)'는 호주와 영국, 멕시코, 미국의 주요 도시를 장기간 순회 중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중국 등이 다음 전시 예정지일 만큼 전 지구적인 문화상품으로 발돋움했다.

이때 논쟁적인 질문이 나온다. 모네, 반 고흐, 클림트처럼 국제적인 인지도를 확보한 화가들의 그림을 차용하되 첨단 IT기술로 원화의 감각 자극을 극대화한 컨버전스 아트를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모네, 빛을 그리다'의 스크린에 투사되는 모네의 작품들은 일명 '원작의 재해석'이라고 양해를 얻지만, 엄밀히 따지면 원작과는 전혀 상이하게 가공된 신상품에 가깝다. 그의 대표작 《해돋이》는 일렁이는 바다와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움직임'을 임의적으로 삽입했다. 《수련》의 경우 모네의 원작에선 볼 수 없는, 날아다니는 나비의 움직임까지 추가했다. 원화에는 존재하지 않는 배경 음악까지 전시를 보는 내내 따라붙는다.

이처럼 원작을 '손봤다'는 이유가 비예술로 단정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냐 하면,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16세기에 완성됐지만, 현대에 와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작업을 거치면서 미켈란젤로의 원작과는 색감이 전혀 다른 파스텔 톤의 화사한 채색으로 보기에 근사하게 변형됐다. 오늘날 우리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만나는 천장화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름 모를 복원사들이 가공한 새로운 화면에 가깝기 때문에 일각의 미술사가들은 복원 작업을 원작 훼손이라고 비난해 왔다. 컨버전스 전시로 가공된 모네, 반 고흐, 클림트 등의 작품도 같은 이치다. 이름 없는 IT기술자들의 크레딧을 숨긴 채, 화가들의 이름값으로 먹고 들어간다는 점에서 시스티나 성당의 복원된 천장화와 조건이 다르지 않다.

"원작의 재해석" vs "원작 훼손"

원작 변형에 대한 유서 깊은 양해에도, 대중 취향의 미디어 아트 전시의 장기 흥행과 주목도는 꺼림칙한 육감을 불러오는 게 사실이다. 화가의 이름만 미끼로 던져도 관객을 줄줄이 낚는 손쉬운 브랜드 전략을 따르는 점, 해바라기나 노란색처럼 반 고흐와 연결되는 친숙한 시각 코드만을 집중 공략하는 증강 효과 의존도, 백만 명대 관객몰이라는 수치에서 압도하는 홍보문구, 이 모두가 시장경제 생태계에서 대성한 지표는 될지언정, 예술의 조건까지 충족시킨 건 아니라고 마지막 자존심은 맞서게 된다. 꺼림칙한 육감의 실체란 그 마지막 자존심과 같은 것일 게다.

뉴미디어 시대의 선택압에 눌려, 한쪽에선 예술보다 사회운동가의 구호에 가까운 지루한 작품을 쏟아내며 관람의 피로를 꾸준히 쌓아올리고, 다른 한쪽에선 관객의 감각 자극을 극대화한 엔터테인먼트를 예술적 감동과 등가인 양 착시하게 만든다. 극단화된 두 광경 사이에서 '스스로 숙련된 소수만이 예술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고 믿어온 나는 복잡한 심경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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