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100도] 두 눈 질끈 감고도..당의 선물이 얼마나 고맙길래
[편집자주][북한 100℃]는 대중문화·스포츠·과학·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북한과의 접점을 찾는 코너입니다. 뉴스1 북한팀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관점을 가감 없이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서울=뉴스1) 김서연 기자 = 지난달 말, 북한에선 청년절을 맞아 각지에서 수많은 청년이 평양을 방문했다. 다양한 행사에 참석한 청년들은 일정 마지막 즈음 놀이동산을 찾았다. 노동신문에 따르면 이들은 개선청년공원유희장과 릉라인민유원지(능라인민유원지)에서 '즐겁고 유쾌한 휴식의 한때'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을 보고는 문득 '과연 유쾌하기만 했을까'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이로스윙과 유사한 놀이기구를 타는 사진 속에서 청년 일부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움츠리거나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어서다. 멀리서 찍어 희미하긴 해도 무서워하는 몸짓만큼은 뚜렷했다.
◇ "당과 지도자의 은덕이 담긴 시간"…거부할 수 없는 일정
어느 정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청년들이 놀이공원을 찾았고, 일부는 겁이 난 것 같으면서도 기구 탑승을 피하지 않았다. 아마 그 까닭은 이들의 평양 방문 속 모든 일정은 김정은 당 총비서가 선사한 '당의 은덕'이 담긴 시간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년들은 당이 진행하는 행사에 참석할 수 있도록 전국에서 선발돼 왔고, 경축 행사 이후로 여러 문화정치 일정을 소화했다. 평소 하던 노동에서 벗어나 몸만큼은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 상황에서 "안하겠다. 싫다"라는 말은 쉽게 내뱉긴 힘들었을 테다. 최고지도자의 은덕, 당이 주는 선물을 거절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다는 걱정이 짙지 않았을까.
평양 방문이 청년들에게 선물이었는 것은 이들보다 앞서 전국노병대회에 참석했던 노병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유추된다.
노병대회 참가자들은 행사 뒤 청년들과 우리식으로 치면 대규모 리조트인 양덕온천문화휴양지에서 휴식을 취했다. 당시 북한은 이 휴식은 '조국의 존엄과 영예를 사수한 승리자들'에 주어진 것이라며 애국심을 고조시키고, 인민을 위해 휴양 시설을 만든 당과 최고지도자의 은덕을 내세웠다. 형태는 다르지만 놀이공원과 휴양지가 당이 특별히 선별한 누군가에게 부여한 선물이라는 의미는 동일한 셈이다.
◇ 북한 최고지도자의 선물 공세…애민관 부각하고 결속 다져
북한 매체에는 김 총비서가 주민들에게 선물을 줬다는 기사가 종종 보도되곤 한다. 매체들은 병원의 기자재 하나까지도 다 그의 선물이라고 주장하긴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한 선물로 소개되는 것들이다. 이럴 때는 당의 '뜨거운 은정이 어린 사랑의 선물을 받아안았다'라는 상투 어구와 반복되고 '당의 은덕에 보답해 나가겠다'라는 수여자들의 다짐이 함께 실린다.
북한 사회에서 김 총비서의 선물이란 그의 애민관을 부각하는 상징이자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과 결속을 다지는 수단이다. 행복해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언젠간 자신 또한 같은 '영광'을 받겠다는 기대감을 자극할 수도 있다. 일종의 선전선동이다.
올해 역시 다양한 선물 목록이 북한 매체를 장식했다. 광명성절(김정일 국방위원장 생일·2월16일)엔 아이들에게 선물을 보낸 김 총비서의 애민 행보가 비중 있게 소개됐다. 그는 전국의 애육원, 초등학원, 중등학원, 섬마을·섬초소 어린이 및 학생들에게 학습장과 학용품 선물을 보냈고, 신문은 선물이 실린 트럭, 전달하는 장면, 학습장을 들고 환하게 웃는 어린이의 모습 등 다양한 사진으로 생동감 있게 소식을 전했다.
◇ 학용품·잣·냉동 수산물 각양각색…그 속에 담긴 '선물 정치'
여러 경로를 통해 공개된 선물들을 모아보면 종류 또한 다양하다. 평범한 학용품부터 '냉동 물고기'까지 스펙트럼이 넓다.
평양에 있는 대표 산부인과 평양산원은 김 총비서로부터 '잣'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당시 매체들은 김 총비서가 그해 첫 산물인 많은 양의 잣을 선물로 보내 환자들의 몸보신과 치료에 쓰게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가 평소에도 산꿀과 보약재, 영양식품 등 친어버이의 뜨거운 정이 깃든 선물을 아끼지 않았다는 언급도 뒤따랐다.
선물을 받는 대상 역시 신중하게 선택된다. 시기와 내용에 따라 수여자들을 조정함으로써 최대의 선전 효과를 누리려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선 작년 연말 평양 주민들이, 올해 초 평양 상원시멘트공장 근로자들이 냉동 수산물 선물을 받았다. 같은 선물이지만 전자는 시기상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추모 및 식량난 해소에 힘을 쓰는 당의 모습을 강조하고, 후자는 품질이 우수한 기업소를 모범으로 내세우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비슷하게 김 총비서는 작년 전승절(7월27일)에는 군 지휘관과 주요 간부들에게 새로 개발한 '백두산' 권총을 수여했고, 올해에는 노병들에 식료품과 보약 등을 보냈다. 올해는 사회주의 정치 기본방식이자 국가 기조로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천명한 만큼 애민적 모습 연출에 더욱 치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막 등교하는 소학교 신입생들한테 책가방이 전달됐다는 소식도 전해졌는데, 이는 사회주의 체제의 육아·교육 정책이 그 무엇보다도 우월하다는 북한의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 겁나도 거부할 수 없는 순간…그들에겐 '가문의 영광'?
북한만큼은 아니어도 우리나라 역시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선물은 꽤 특별하게 여겨지는 듯하다. 몇 년 전에는 대통령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시계가 인기를 끌었다. 소셜미디어엔 시중에 판매되지 않는 이 기념 시계를 받은 사람들의 자랑이 이어졌고 웃돈을 주고서라도 시계를 사겠다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우리가 북한 사람들의 마음은 알 순 없지만, 이처럼 '대통령 굿즈'(상품)를 확보하고자 하는 마음에 충성까지 더한다면 최고지도자한테서 선물을 받는 기분쯤 되지 않을까. 남한에선 대통령과 찍은 사진은 기념품 정도에 불과하나 북한이라면 최고지도자와 찍은 사진은 대대로 자랑할 '가문의 영광'이라는 더 큰 의미가 부여되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놀이기구에 탑승해 두 눈을 가렸던 청년한테도 아마 그 시간은 카메라 앞에서 숨길 수 없을 만큼 겁이 나면서도 반드시 쟁취해야 할 '평생의 영광'이었을 수 있다. 긴 시간 멀리 떨어져 살아온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과 감정이다. "최고지도자 동지의 선물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언젠간 이렇게 사양하는 북한 사회가 올지 그날을 상상해 본다.
s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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