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 골프소설 13] 골프사 최초 문헌이 골프 금지령

2021. 9. 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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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제임스 2세가 골프 금지령을 내린 것이 공식적인 첫 골프 기록이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골프채를 쓰다듬고 있던 헨리는 깊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헨리의 할아버지는 홀란드(네덜란드) 아이들이 잘 다듬어진 막대기를 가진 걸 알고 있던 터였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엔 나무가 많았고 특히 가지가 가늘게 뻗친 물푸레나무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가지 하나를 잘라 막대기를 만들었다. 헨리는 할아버지 덕분에 나뭇가지를 주워 사용하지 않아도 됐다. 헨리만의 전용 나무 골프채가 하나 생긴 것이었다. 그 막대기로 헨리는 평생 골프를 쳐왔고 나름대로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새로 즉위한 제임스 2세 왕이 골프를 치지 말라고 포고령을 내린 게 과연 잘한 일인지에 대해 헨리는 반신반의했다. 그저 평범한 목동 출신으로 평생을 보낸 헨리같은 서민은 왜 왕이 그 같은 칙령을 발표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포고령이 내려지던 1457년 당시의 시대 상황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군사적으로 대치하던 상황이었다.

군인들은 매일 같이 전시 체제하에서 군사 훈련을 해야 했다. 그중 제일 중요한 훈련은 궁술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이나 민간인들 사이에서 이 시절 유일한 낙은 골프치는 일이었다. 당연히 병사들은 골프에 빠져서 훈련을 게을리 할 수밖에 없었다.

116년을 끌어오던 프랑스와의 백년전쟁이 몇 해 전인 1453년에 끝났지만 잉글랜드로서는 스코틀랜드를 한 시도 마음놓을 수 없었다. 비록 잉글랜드는 전쟁에는 졌지만 호전적인 민족임을 스코틀랜드는 잘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전열을 가다듬고 스코틀랜드와 싸움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다.

백년전쟁이 피부에 와닿지 못했던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너도나도 보란듯 골프에 열중하고 있는 게 당시 상황이었다. 보다 못한 왕이 풋볼과 골프를 금지시켜야겠다고 결심한 까닭은 그처럼 범국민적으로 나태해진 풍조 때문이었다.

‘병사들이 활쏘기 연습과 훈련을 게을리 하고, 오늘날의 풋볼인 퓨트볼(FUTE-BALL)과 고프(GOEFF)에만 정신이 쏠려있어, 차후 이 두 가지 운동을 금한다.’ - 제임스 2세 칙령

스코틀랜드 고유언어인 게일어로 된 칙령에 따르면 퓨트볼은 30여 년 전인 1424년에 아버지인 제임스 1세에 의해 금지되어온 스포츠였다. 이 같은 발표가 있고서 스코틀랜드는 골프가 일체 금지되었고 이를 어기는 자는 벌금을 물거나 감옥으로 끌려갔다.

칙령이 발표되면서 동쪽 에딘버러와 세인트 앤드루스 지역에 더 강력한 단속을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동쪽 해안이 지형상 전략적 요충 지대였고 특히 수도인 에딘버러의 항구는 사수해야만 하는 중요 거점이었다. 하필 이 지역의 주민은 물론 수도원 주교들까지도 극성일 정도로 골프에 빠지는 것에 왕은 위기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칙령이 발표된 후에도 겉으로는 금지됐지만 암암리에 골프는 행해지고 있었던 사실에 대해서도 왕은 골치를 앓았다.

심지어는 칙령 이후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수도원 주교들은 교회 앞마당에서 50~100 미터 정도의 짧은 거리의 홀을 만들고 수도원 안에서 몰래 골프를 즐겼다. 그러다 들키면 벌금을 내야 했고 재차 적발되면서 주교직을 박탈당한 자들도 있게 될 정도였다.

남쪽 잉글랜드에서도 이와 유사한 스포츠 금지령이 이미 오래전인 1363년에 내려진 바 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에 의한 칙령이었지만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그것처럼 ‘골프’라는 단어가 적혀 있진 않았다. 스코틀랜드보다 거의 백년 전에 내려진 이 포고령 역시 군인들과 백성들이 궁술 연습을 하지 않고 풋볼이나 골프와 비슷한 캄부카(CAMBUCA)에만 열중한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의 왕들은 국민들의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 포고령의 내용은 ‘모든 잉글랜드의 남자들은 작금의 시대적 상황에서 레저를 즐기려면 활과 화살을 이용한 스포츠를 즐겨야 한다. 그리고 활을 쏘는 것을 마치 예술을 하듯이 해야 한다. 이에 캄부카와 풋볼 등 궁술을 제외한 일체의 공놀이를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잉글랜드가 포고령을 내리게 된 이유도 전쟁 때문이었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서남부에 위치한 와인 생산의 명문인 보르도 지방의 영지를 탈환하기 위해 프랑스를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전쟁을 눈앞에 두고 군사들의 기강이 풀어지는 것을 차단한 조치인 것이었다. 군대를 효율적으로 관리한 잉글랜드는 각 지방의 영주들을 규합해 용병을 모아 프랑스와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프랑스는 폭동과 데모 등 어지러운 사회상이었던 탓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가 패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잔다르크가 나타났다. 1429년 5월 ‘프랑스로 가서 오를레앙을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잔다르크는 당시 쓰러져 가는 프랑스의 성녀로 추앙받았지만 이듬해 1430년 잉글랜드군에게 체포돼 19세의 어린 나이에 마녀라는 죄목으로 화형당했다. 프랑스는 잔다르크 희생으로 인해 일치단결해 1453년 무려 115년동안 지속됐던 백년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잉글랜드와의 지리한 전쟁을 종식시켰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이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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