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앞서간 예술가 김구림 "늘 내가 처음이었다"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 "화가들이 이젤 놓고 풍경화 그릴 때 난 강둑을 불태웠어요. 남들이 조각 깎을 때 큰 빨간 보자기에 얼음을 싸놓고 조각이라고 했어요. 종이에 찍는 판화 대신 식탁보에 걸레를 놓고 누렇게 물들였어요."
김구림(85)이 회상하는 작업 하나하나가 왜 그가 한국 1세대 전위예술가, 실험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지 보여준다.
그는 1970년 4월 한강변 경사진 둑에 지그재그로 선을 그어 삼각형을 만들고 불태웠다. 국내 첫 대지미술로 꼽히는 '현상에서 흔적으로'이다.
같은 해 보자기로 감싼 얼음덩어리가 녹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을 선보이려 했으나, 국립현대미술관이 얼음 작업 전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국제판화비엔날레에서는 걸레에서 번진 것처럼 얼룩을 낸 '걸레'를 판화로 볼 수 있는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모두 무려 약 50년 전 일이다. 지금 시대 기준으로도 파격적인 작품을 반세기 전에 발표한 김구림에게는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17일 개막한 개인전 '음과 양(YIN AND YANG)' 전시장에서 만난 김구림은 "미친놈이라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나는 늘 가장 첨단을 걸었다"라며 "내가 하지 않은 분야가 없고, 늘 내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1958년 첫 개인전을 연 그는 회화, 판화, 조각, 도자, 사진, 설치미술, 퍼포먼스, 대지미술, 비디오아트 등 장르를 넘나들며 관습을 무너뜨리는 작업을 했다. 1969년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1970년 제4집단 결성에 앞장서며 한국 전위예술에 한 획을 그었고, 후배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술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음악, 무용 등 분야도 가리지 않았다. 국내 최초 실험영화로 평가받는 '1/24초의 의미'를 1969년 제작했고, 1970년 명동국립극장에서 열린 서울국제현대음악제 총연출을 맡기도 했다. 영국 런던 전위음악전문 공연장에서 자작곡 '시속의 울림과 마음속의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다.
"미술 쪽에 치우쳐 있지만 나는 그냥 예술가입니다. 미술을 주로 한 것은 누구 간섭도 받지 않고 100%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죠. 배우나 연주자가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수 있지만 미술은 내 멋대로 하고 내가 책임지잖아요."
그러나 시대를 너무 앞선 탓인지 그가 걸어온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학연 중심의 국내 미술계는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이단아 취급했다.
그는 "외국에서 대접받았지만 우리 화단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왔다"라며 "가슴에 맺힌 것도 많고 몇 번이나 나라를 뜨려고 했다"로 말했다.
실제로 그는 1985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백남준과 2인전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2000년 귀국했다. 그러나 돌아온 그는 먹고 살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고, 작품 활동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2012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쿠사마 야요이 등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들과 함께 김구림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의 작업도 재조명됐지만,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진짜 이 나라를 뜨자는 생각으로 작년에 뉴욕에 다시 가서 집까지 알아봤는데 코로나로 지금까지 여기 있네요. 내가 이름이 나 있으니 잘 산다고들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말기암과 심장판막부전증으로 건강 상태도 좋지 않지만 김구림은 "내 작업에 아직 불만이 많아 어느 하나 대표작으로 내세우지 못하겠다"며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얼마나 더 살지 모르니 요즘에는 작품이 자꾸 어두워진다"라면서도 "하지만 여전히 나는 현실을 망각하지 않고 늘 작품에 시대를 반영한다"고 덧붙였다.
평생 한가지에만 몰두한 작가들에 비해 김구림의 예술은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시각도 있다.
"피카소, 데미안 허스트도 한 가지만 하지 않았어요. 하나 가지고 영원히 내 세계라고 하는 시대는 끝났어요. 나는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시대를 반영해 새로운 작품을 했어요. 먼 훗날 역사가 증명할 것입니다."
이번 전시는 회화와 오브제, 드로잉 작품을 통해 김구림의 예술 세계를 조명한다. 신작을 포함한 작품들은 김구림이 1980년대부터 작업해온 음양 연작이다. 양극 혹은 전혀 관계없는 두 이미지가 한 화면에 공존한다.
회화는 디지털 이미지를 화면에 붙인 뒤 붓질로 이를 지워가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오브제 작업은 나무 패널 위에 금속, 케이블, 바이올린 몸통, 털 등을 붙이는 등 여러 폐기물을 이용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킨다.
김구림은 미국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실험미술을 조명하는 공동기획전에 참여할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 개최도 추진 중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전시를 열어 내 미술 작품과 함께 옛날에 만든 연극과 무용, 음악 등을 보여주고 영상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doubl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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