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한 독서] 나이팅게일은 간호만 하지 않았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평전〉
김창희 지음
맑은샘 펴냄
얼마 전, 방호복을 입고 노인 코로나 환자와 화투놀이를 하는 간호사의 사진이 온라인에서 퍼지며 큰 화제가 됐다. 감동적이다, 영웅이다, 방호복을 입은 천사다, 사방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그즈음 나는 간호사 김창희가 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평전〉을 읽고 내친김에 영국의 소설가이며 간호사인 크리스티 왓슨이 쓴 〈돌봄의 언어〉를 읽고 있었다. 나는 사진을 보며 간호에 대해 생각했다. 매뉴얼화할 수 없는 간호 일의 넓이와 깊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이팅게일은 “간호는 환자를 간호하는 예술이다. 병 자체가 아니라 환자를 간호하는 것이란 점에 유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가 간호를 예술이라 한 것은 간호엔 “독창적인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고립된 병실에서 쇠약해지는 노인 환자를 위해 간호사들이 그에게 익숙한 화투로 그림 맞추기를 하는 창의적 치유법을 고안해낸 것처럼, 좋은 간호는 예술적이다.
간호사는 예술가이면서 또한 과학자여야 한다. ‘예술 간호’를 주창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여성 최초로 영국 왕립통계학회 회원이 되었을 만큼 과학적 방법을 중시했다. 열일곱 살 때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꿈을 미뤄야 했던 그는, 본격적인 간호교육을 받기까지 십여 년간 유럽과 이집트의 병원들을 다니며 좋은 병원을 위한 조건을 연구하고 실증 자료들을 수집했다.
크림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간호학교에서 받은 전문적인 교육을 바탕으로 부상병들의 병상을 지켰을 뿐 아니라 그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파악하려 애썼다. 얼마나 많은 병사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른 채 주먹구구식 치료를 행하던 상황에서 그는 전쟁터에서 죽는 병사보다 병원에서 죽는 병사들이 더 많다는 것을 통계로 입증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병원의 위생을 비롯해 군 예산 사용 등 영국 군대의 전반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800여 쪽에 달하는 보고서로 제시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군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안이 상당 부분 받아들여진 것은, 반대를 무력화할 만큼 철저한 과학적 분석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에게 간호사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묻는다면 그는 예술적·과학적 소양보다도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공감과 연민, 이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명감이 먼저라고 대답할 것이다.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어머니를 따라다니곤 했다. 하나 그는 잠깐의 자선에 만족하지 않았다.
“우리가 화려한 생활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이런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구나.”
그는 이웃의 고통을 제 일처럼 아파했고 책임을 느꼈다. 그리고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드는 “가난과 질병”에 맞서 싸우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를 위해 통계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며 사회개혁을 고민했고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것이 상류층 여성의 본분이던 시절이었다. 가족 특히 어머니는 충격과 배신감에 연을 끊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는 결혼은 여성을 억압하는 도구라며 “우아한 거실”을 떠나 고통의 현장에서 자신의 뜻을 펼쳤다.
나이팅게일은 근대 병원 시스템을 구축한 행정가, 빈민법과 공공보건의료법을 이끈 보건위생 전문가이자 사회개혁가였고, ‘장미 도표’를 고안한 뛰어난 통계학자였으며, ‘집안일, 여성의 일’이라며 홀대받던 간호를 의학의 한 분야로 체계화한 현대 간호학의 창시자요 여권운동가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는 내내 그는 간호사였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간호사로서의 사명이 분야를 넘나든 놀라운 성취의 동력이었다.
간호의 핵심은 ‘환자를 돌보는 여러 잡일’
나이팅게일이 보여주듯 간호사는 오지랖이 넓다. 가끔은 자신의 정체가 의심될 정도다. 나이팅게일이 씨를 뿌린 영국 국립보건서비스(NHS) 소속 간호사 크리스티 왓슨은 그래서 20년 간호 인생을 돌아보며 ‘간호란 무엇인가’를 계속 되묻는다. 간호사는 의사들처럼 (때론 의사보다 더 능숙하게) 진단·검사·치료를 하고 중환자의 생명유지 장치를 관리한다. 또한 환자들의 침대 시트를 갈고, 식사와 배변을 돕고, 그들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의료 행위는 의사들보다 싼값에 이루어지며 (한국의 PA 간호사들은 법적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의사 업무를 대신한다), 그들의 간호 행위는 전문적인 의료가 아닌 ‘잡일’로 무시되기 일쑤다.
그러나 크리스티 왓슨은 의료 행위만이 아니라 환자를 돌보는 여러 잡일이 “환자들의 치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측면으로서 간호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그가 경험으로 배운 간호에는 환자의 침상을 지키는 일은 물론이고 세상을 떠난 환자의 시신을 거두고 유족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까지 포함된다. 간호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호사는 때론 의사로 때론 보호자로, 때론 예술가로 장례지도사로 사회복지사이자 신의 대리인으로 아픈 사람의 곁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간호 일이 비전문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아픔은 질병 때문만은 아니며 질병의 원인조차 단순하지 않음을 반영한다. 사람은 병 때문에 아프기도 하지만 병든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프다. 이 공감이야말로 사람을 사람이게 하고 좋은 간호사를 만드는 힘이다.
전에는 영리란 명목으로, 최근에는 감염병을 핑계로 이 오랜 힘을 고갈시키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K방역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 전체가 공감의 힘으로 가장 약한 자들을 돌아보고, 환자와 환자를 돌보는 이들을 지키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더는 천사라는 이름으로 희생을 강요하지 말자.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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