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홉·막걸리 효모 ‘외국산’ 퇴출… 100% K술로 짠~ [S 스토리]

김희원 2021. 9. 18.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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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술족’ 늘며 2020년 주류수입 11억弗 넘어
마라탕 등 인기에 중국 고량주 수입 급증
전통술 막걸리 발효 위한 효모 수입 의존
농진청, 맥주보리 품종 개발에 공들여
한국 기후에 맞는 홉·쌀맥주 제조도 연구
‘K고량주’ 제조기술 개발·수수 재배 확대
원료 생산농가 적어 가격경쟁력 ‘숙제’
“술 제조에 곡물 다량 소비… 국산화 필요
안전 먹거리 이미지 구축 소비 활성화”
지난 10일, 전주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의 발효가공식품 실험동에 들어서자 구수하면서도 달큰한 냄새가 복도를 가득 메웠다. 국내에서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수수가 실험실의 커다란 스테인리스 통에 가득 담겨 삶아지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비닐로 덮인 노란 플라스틱 박스들이 층층이 놓였다. 삶은 수수를 누룩과 섞어 발효하는 중이었다.

발효된 수수는 증류기에 넣어 증류한다. 이렇게 나온 결과물은 다시 발효과정을 거쳐 술로 완성된다. 100% 국산 원료로 탄생한 고량주다.

◆유기농·무첨가제 K고량주로 고량주 수요 대체

중국에서는 수수, 옥수수, 밀 등 곡물을 넣어 증류한 맑은 술을 모두 백주로 칭한다. 고량주는 수수로 만든 술이라는 뜻이지만, 한국에선 중국의 백주를 보통 고량주라고 부른다.

한국형 고량주 개발을 이끄는 정석태 연구관이 시제품으로 만든 고량주를 건넸다. 강한 알코올 냄새와 과일향이 먼저 후각을 때렸고, 간장 냄새와 비슷한 은은한 곡물 발효 냄새가 뒤따랐다. 과일향이 첨가된 중국의 중저가 고량주가 상큼하고 가벼운 향이라면, 한국형 고량주의 향은 다소 무게감이 있고 은은하게 퍼졌다. 삼킨 뒤에도 특유의 향긋함이 입안에 감돌았다. ‘기대 이상’이었다. 중국 고량주와 경쟁에서도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 정석태 연구관(오른쪽)과 강희윤 연구사가 삶은 수수를 들어 보이고 있다.
정 연구관은 “중국산 중저가 고량주는 대체로 과일향을 첨가하는데, 국산 재료로 고량주를 만들면서 첨가물을 넣으면 중국 고량주와 뭐가 다르겠느냐”며 “수차례 시행착오 끝에 첨가물 없이도 향긋함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고량주 미생물 중 바실러스 리체미포미스를 활용해 향을 강화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올해 초 민간 고량주 제조업체인 한국고량주에 이전됐다.

농진청의 한국형 고량주 개발은 2019년 시작됐다. 수수 품종별 제조 적합성을 평가하기 위해 국산 수수 품종과 옥수수, 밀 쌀 등을 사용해 실험했으며, 고체발효 효율을 제고하기 위해 재료의 배합비율을 최적하고, 고효율 효모를 개발해 적용했다. 그 과정에서 연구팀은 30년 전 문을 닫은 고량주 생산 공장의 공장장과 중국 백주 전문가 등을 만나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했다.
강원도 영월에서 동안메 품종 수수가 재배되고 있는 모습. 동안메는 고량주로 만들기 적합한 품종으로 한국형 고량주 개발 프로젝트의 주원료로 쓰인다.
농진청은 고량주뿐 아니라 와인, 맥주, 청주 등 외국술과 소주, 막걸리 등에도 국산 원료 사용을 높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양조전용 농산물 품종 생산을 확대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품질과 가격 측면에서 외국산에 뒤처졌던 국산 맥주보리 품종은 최근 품질이 크게 개선됐다. 현재 국산 맥주보리 23품종이 등록돼 있으며, 1개 품종은 출원 준비 중이다. 수제 맥주의 인기로 한국산 홉 수요가 높아진 만큼 한국 기후에 맞는 홉도 개발 중이다. 쌀가루 이용을 높이기 위한 쌀 맥주 제조 연구도 진행 중이다.

와인에 사용되는 포도는 청수(백포도주), 두누리(적포도주), 나르샤(로제)가 개발돼 보급 중이다. 이 중 청수는 한국 고유의 양조용 품종으로 국제와인기구(Organization of Vine and Wine: OIV) 등록을 추진하고 있다. 누룩 유래 미생물 기술을 사용해 한국 쌀 품종 삼광으로 만든 청주도 있다.

농진청은 이 밖에도 조선시대 문헌을 복원한 양조기술, 발효 탄산 조절기술 등을 개발해 주류업체에 이전했다. 아울러 주류업체의 국산 농산물 사용을 유인하기 위해 주원료가 국산 농산물인 민속주·지역특산주의 주세경감을 확대하는 등 인센티브 제공을 추진할 계획이다.
◆원료 국산화로 농가소득·소비자만족도 높인다

국가 연구기관인 농진청이 술 연구에 공을 들이는 것은 양조업이 농가소득을 증대시키고 지역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농업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먹방’의 유행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홈술족’ 증가로 주류 트렌드가 다양화했지만 한국 주류산업은 제자리걸음이다.

국내 주류 수입은 2014년 7억8603만달러에서 지난해 11억687만달러로 6년 만에 40%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주류 수출은 4억255만달러에서 3억2244만달러로 줄었다.
국내 고량주 수입금액은 2010년 225만달러에서 지난해 1203만달러로 5배 이상 뛰었다. 마라탕, 양꼬치 등 새로운 중식 트렌드가 자리 잡기 시작한 영향이다. 고량주를 제조, 판매하는 업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국내 고량주 시장은 중국, 대만 등 외국산이 100% 점유하고 있다.

와인은 지난해 수입 주류 중 가장 많은 금액(3억4516만달러)을 차지한다. 최근 경북 문경의 오미로제, 충북 영동 시나브로 등 지역 특산물을 원료로 만든 한국산 와인이 약진하고 있지만 대형마트나 와인전문점에서 이들 와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맥주는 지난해 2억2692만달러어치 수입됐다. 국내 시장에서 소비되는 맥주는 국산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국산 맥주도 원료는 95%(2015년)가 외국산이다.
소주와 전통주인 막걸리도 원료 국산화 과제를 안고 있다. 한국인이 즐겨 마시는 초록병 소주는 값싼 외국산 타피오카와 고구마 전분에서 에틸알코올을 추출해 물과 감미료를 섞어 만든 것이다. 막걸리는 100% 국산 쌀을 사용하더라도 발효 과정에서는 대부분 외국산 제빵효모를 사용한다.
농진청은 외국 술을 한국산 재료로 개발해 수요를 발굴하거나 한국에서 생산되는 주류 원료의 일부를 국산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도 국내 농가 생산성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이 개발 중인 한국형 고량주 시제품.
국산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양조기술이 속속 개발되고 있지만, 문제는 가격이다. 국산 주류 원료는 생산 농가가 적어 외국산과 비교해 5∼20배 정도 가격이 높다. 비싼 국산 원료 술이 값싼 외국산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고유의 특색이 있는 제품 개발,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 안전한 먹거리 이미지 구축 등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최한석 한국농수산대학교 농수산가공학과 교수는 “국산 주류는 경제적인 관점보다 상생과 가치소비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주류 소비는 농산물 소비와 같기 때문에 주류와 원료 수입이 이런 추세로 높아진다면 한국 농업과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생산비 절감기술을 지속해서 개발하고 품질을 높이면 국내와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밝혔다.

전주=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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