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변장, 밀항, 체포...열아홉살 백신애의 시베리아 방랑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2021. 9.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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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
자작나무, 雪原, 오로라 동경
시베리아 체험 담은 대표작 ‘꺼래이’ 남겨
요즘 패션지 표지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세련된 스타일의 소설가 백신애. 90년 전 동경 유학시절 찍었다. 백신애는 1930년 5월 일본에 건너가 니혼대학 예술과에서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다. 딸의 유학을 반대한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을 끊으면서 여급, 가정부, 세탁부일까지 했던 짧은 유학생활이었다. /영천시 공식블로그

‘언젠가 꼭 레나 강에 조각배를 띄우고 강변에는 자작나무로 된 통나무집을 짓고 눈이 하얖게 덮인 설원을 걸으며 아름다운 오로라를 바라볼거야! 그리고 초라한 방랑시인이 되어 우랄 산을 넘을 땐 새빨간 보석 루비를 찾아 볼가의 뱃노래를 멀리서 들을거야.’

세계지도를 쳐다보며 시베리아 방랑을 꿈꾸던 소녀는 열아홉살되던 가을 밤,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고향 집을 빠져나왔다. 어머니에겐 병든 친구의 임종을 지키러 가는 길이라고 난생 처음 거짓말까지 했다. 원산에서 웅기까지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단발머리를 틀어올려 시골 여자애로 변장했다. 웅기 도착후 다시 출항할 때까지 화장실에 숨어 5시간을 버텼다. 선원에게 발각됐지만 다행히 짐칸으로 옮겨 블라디보스톡항에 도착했다.

갑판에서 몰래 뛰어내린 그를 맞은 건 소련 헌병의 총검이었다. 한달여 유치장에 갇혔다 소만국경으로 추방됐다. 조선인 농가에 머물면서 도움을 받아 ‘쿠세레야 김’이란 이름의 여권을 만들어 블라디보스톡 입성에 성공한다. 첩보영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소설가 백신애(1908~1939). 1927년 가을에 벌어진 ‘시베리아 방랑’ 출발기다.

◇방랑은 1930년대의 키워드

‘방랑은 실제로 1930년대의 키워드였다.’

러시아 문학 전공자 김진영 연세대 교수는 2017년 낸 책 ‘시베리아의 향수’에 이렇게 썼다. 자작나무가 끝없이 펼쳐진 설원(雪原), 오로라, 통나무집... 10대 백신애를 포함, 조선 청년을 사로잡은 낭만의 상징이었다. 미국과 유럽, 일본, 중국 여행은 유학이나 사업, 개척을 위한 구체적 목표를 가졌지만, 시베리아는 유독 정처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의 공간이었다.

영화 ‘아리랑’주연 나운규의 ‘나의 로서아 방랑기’(1927)부터 홍양명(1931), 김동진(1932), 한용운(1933), 이규갑(1934), 현경준(1935), 김서삼(1936), 이극로(1936), 여운형(1936), 이광수(1936)까지 시베리아 방랑 체험을 소재로 한 여행기를 신문, 잡지에 남겼다. 김진영은 ‘집단적 방랑의식의 발단은 한일합방이었다’고 봤다.

◇신춘문예 출신 첫 여성작가

백신애는 1929년 1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분야에 1위로 당선하면서 등단했다. 수상작 '나의 어머니'가 실린 조선일보 1929년 1월1일자

시베리아 방랑 직후 고향인 경북 영천에 돌아온 백신애는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공모에 단편소설 1등을 받으면서 등단했다. 신춘문예 사상 첫 여성당선자였다.수상작은 ‘나의 어머니’. 박계화란 필명으로 응모했다. 중견 기자 한달치 월급인 60원을 상금으로 받았다.

당시 조선일보에 소설 ‘향원염사’(香園艶史)를 연재하던 최독견(1901~1970)이 심사위원중 하나였다. 최독견은 ‘문장이나 기교는 결코 묘하고 능란한 것은 아니다’면서도 ‘억지가 없고 순진한 정서의 유로(流露)가 보인 것도 좋지만 후미에 이르러 그 필봉이 한층 날카로와지고 침착해진 것이 무엇보다도 좋다’(조선일보 1929년 1월1일자 ‘手法其他 1’, 파란 부분을 클릭하면 옛날기사 원문을 볼 수있습니다.)고 호평했다.

‘나의 어머니’는 자전소설이다. 감옥에 들어간 오빠 뒷바라지에 수심 가득한 어머니는 동네 청년들과 어울려 연극한답시고 늦게 들어오는 딸에게 꾸지람만 쏟아낸다. 이 어머니와의 갈등과 화해를 담았다.

◇여성청년동맹, 조선여성동우회 활동한 맹렬 신여성

소설 속 오빠는 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 때 검거된 백기호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독학하던 동생에게 책을 권하고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한 ‘마르크스 보이’였다. 사업가 외동딸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란 백신애는 오빠 덕분에 일찍 여성운동과 사상 운동에 눈떴다.

경북 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한 1924년 모교인 영천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를 하면서 사회주의 계열 ‘여자청년동맹’과 ‘조선여성동우회’에 가입했다. 1926년 1월5일 문화소년회가 주최하고 조선여성동우회가 후원하는 강좌가 경성 청진동 회중교회에서 열렸다. 백신애는 여성동우회 대표로 ‘어머니가 꼭 지켜야 할 일’이란 강연을 했다.(조선일보 1926년1월2일 ‘어린이와 소년회 5일오후에’)

백신애는 이런 활동 때문에 1926년 1월 학교에서 권고사직당했다. 그러자 서울에 올라와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주세죽과 함께 여성동우회 집행위원에 뽑히는가 하면, ‘정사(情死)는 자본주의의 산물이다’란 제목으로 연사로 나섰다(조선일보 1926년 8월15일 ‘정사비판강연 演士와 演題’)

◇일본유학 시절 체홉 연극 주연

1927년 가을까지 여성운동에 바빴던 백신애는 돌연 시베리아 방랑에 나선다. 혁명 직후 러시아에 대한 동경과 사회주의 조직과 관련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1939년 발표한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에는 러시아 병사와의 만남, 자작나무, 설원처럼 낭만으로 가득한 10대의 모험심만 돋보인다.

시베리아에서 돌아오다 두만(豆滿) 국경에서 일경(日警)에 체포된 백신애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 소련 스파이거나 비밀임무를 띠고 잠입한 조직원으로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이때 당한 고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없게 됐다. 부자였던 아버지가 손 쓴 덕분에 백신애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고향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의 시베리아 방랑은 몇 달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영천에서 신간회와 근우회, 청년동맹 활동으로 바빴던 백신애는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사회운동과 거리를 뒀다고 한다. 1930년5월 일본에 건너가 니혼(日本)대학 예술과에서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다. 체호프 단편 ‘개’를 무대에 올린 연극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하기도 했으나 반응이 신통찮았다. 과년한 딸의 유학이 맘에 들지 않았던 백신애의 아버지는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렸다. 바에서 여급생활도 하고, 식모, 세탁부를 해가면서 버티다 1932년 가을 귀국했다. 이듬해 봄 은행원 출신으로 아버지 사업을 돕고 있던 이근채와 결혼했다. 결혼 5년을 넘기면서 1937년 별거에 들어가기까지 비교적 평탄한 생활을 하며 창작에 몰두했다.

◇서른 한살에 췌장암으로 요절

백신애는 조선일보 1938년 6월25일부터 7월7일까지 '광인수기'를 연재했다.

백신애가 1934년 1월과 2월 잡지 ‘신여성’에 연재한 ‘꺼래이’는 시베리아 방랑 체험을 담은 대표작이다.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시베리아를 떠도는 조선인의 수난을 그렸다. 1937년 ‘현대조선여류문학선집’에 수록되면서 대표적인 여성문학작품으로 떠올랐다. ‘복선이’ ‘채색교’ ‘적빈(赤貧)’ 등 단편 소설을 잇따라 발표한 백신애는 조선일보에 ‘광인수기’(1938년 6월25~7월7일), 월간지 ‘조광’ 1938년 7월호에 ‘소독부’를, 1939년 5월호에 ‘혼명에서’를 발표했다. 신문, 잡지에도 수필과 에세이를 많이 썼다.

백신애의 마지막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1938년 하반기부터 건강이 악화된 백신애는 이듬해 5월말 경성제대 병원에 입원했다가 한달만인 6월28일 오후 5시에 세상을 떴다. 췌장암이었다. 후배 작가 이선희는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고 나타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이렇게 썼다. ‘신애ㅡ그는 무엇인가 늘 찾았다.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찾아 헤매이노라고 그의 정열은 필요 이상으로 그 생명을 불태우는 것같았다.’(조선일보 1939년6월27일 ‘哭白信愛’)

병실 한켠에 원고뭉치로 쌓여있던 유작 ‘아름다운 노을’은 월간지 ‘여성’(1939년11월~1940년2월)에 연재됐다. ‘방랑은 청춘의 생명이며 인생행로의 첫 출발’(현경준, ‘西伯利亞방랑기’)이라는 구절대로, 백신애는 1920년~1930년대를 방랑하며 뜨겁게 살다갔다. 고향 영천에서는 백신애 문학상과 문학제를 운영하면서 그의 삶과 문학을 기리고 있다.

◇참고자료

백신애, 나의 시베리아 방랑기, 백신애선집, 현대문학, 2009

백신애, 나의 어머니, 조선일보 1929년 1월1일자

현경준, 西伯利亞방랑기, 新人文學 2권2호, 1935년3월

김진영, 시베리아의 향수, 이숲, 2017

이중기, ‘백신애, 그 미로를 따라가다’, 백신애선집, 현대문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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